Janer Radcliffe Richards, The Sceptical Feminist: A Philosophical Enquiry,
Penguin Books, 1980.
7장
1. 페미니스트들 중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는 것이 남성 지배에 대한 투항이며, 페미니즘 신조에 어긋난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2. 우선성 논변
첫째,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꾸미기는 시간을 많이 투여해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없다고 하는 논변. 그들이 원한다면 옷이나 화장 등에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둘째, 꾸미기 요구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 매스미디어가 한 몫을 한다.
셋째, 사람들의 취향이 지나치게 표준화되어, 여러 종류의 미가 무시된다.
넷째, 패션이 여성이 활동하기에 불편하고 건강을 해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이유는 실제로 논의되고 있는 것 전부를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외모를 가꾸는 데 어떠한 노력도 하기를 꾸준히 거부하는 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위 네 가지 이유는, 약간의 노력을 들여 깔끔하게 외모를 단장하는 것에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패션, 다양성, 시간, 돈, 노력을 피하면서도 여성스럽고 예쁜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옷 입기에서 중요한 모든 것이 가장 싸고 쉬운 것만은 아니다. 스타일은 그 자체가 중요하다. 게다가 일부러 여성스러운 옷을 피해서 입는 것은 노력과 시간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편안함과 실용성 있게 외모 꾸미기를 피하는 실천을 모두 설명할 수가 없다. 즉, 이러한 편안함과 실용성에 대한 자기 가치 우선순위에 따라 꾸미는 사람들도 여전히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적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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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스스로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다.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꾸미는 여성은 남성에게 매춘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좋은 것이다라는 식이다.
3. 즐거움의 대상이 되는 것에 관하여
그러나 즐거움의 대상으로서만 다루어지는 것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사랑의 가능한 기반이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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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난망적 전통에는, 사랑이란 즐거움을 주는 것이 기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히 이타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에는 터무니없는 면이 있다. 즉 즐거움을 받는 것에 개의치 않아야 사랑이라고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일이 발생해도 나를 사랑하겠느냐’라는 테스트 게임의 기반이 되는 태도이다. 즉, 가난해져도, 추하게 되어도, 기형이 되어도, 불구가 되어도, 멍청해도, 학력이 낮아도, 인기가 없어도, 알콜 중독이라도, 광인이라도 사랑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절차는 요점을 갖고 있다. 즉, 당신이 자신 안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속성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있는지 또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속성으로 인해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가려낼 수 있는 것이다.
187 그러나 그 배후에 있는 함의는 항상 이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람들이 당신이 누군인가 때문에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달라도 괘념치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부에는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다른 것들은 어떤가? 이것들은 실제로 당신의 속성들이다. 이런 목록을 열거하고는 그 목록들을 가진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당신은 진정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과 별개로 당신의 진정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속성들이며, 당신이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갖고 있었더라면 사랑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당신이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사고실험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랑은 전혀 아무 것에도 기초하고 있지 않아야 진정한 것이라는 함의로 쉽게 빠져든다.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어찌하여 기쁨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 것이 사랑이라 불려야 하는가? 그리고 만일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런 사랑을 누가 받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연인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사랑받기를 바란다. 어느 누구도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순전히 이타주의 때문에 당신에게 헌신할 만큼 당신의 연인이 비이기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발견할 만한 만족이 없다. 이기적인 즐거움을 피하려는 결심은 완전히 다른 사람을 골랐을 것이다.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은 상대를 기꺼이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일 상대를 의도적으로 불쾌하게게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연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물론 많은 여성들은 남성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문제이지만, 여성이 남성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일반 원리가 될 지점은 하나도 없다. 여성이 남성을 원하는 것에는 내재적으로 비하하는 바가 없다. 서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 호혜적이지 않는 조건에서만 그러한 것이다.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는 관계에 비하적인 것은 없다. 게다가 즐겁게 해주기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여성의 의존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감각적 즐거움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고받는다는 점에는 아무런 비페미니즘적인 것이 없으므로, 특유한 타입의 즐거움에 대한 거부에 외모 꾸미기 거부가 기반할 수 있을까. 즉, 잘못된 이유로 여성을 원하는 남성들에 대적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까. 여성들을 오직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남성 말이다. 성적 대상과 미적 대상 사이의 구분을 긋는 것을 어렵다. 왜냐하면 그 미가 실제로 그 형태에서 섹시하지 않더라도 여성의 미는 남성에게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페미니스트 입장의 정수는, 여성이 모든 측면에서 남성에게 감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요구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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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성적 대상으로 사용되지 않음은 분명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을 받을 가능성은 없어진다. 즉, 여성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는 남성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하지 않는 것이 목표라면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꾸미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 바로 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품, 지성, 친철함, 동정심 등을 가치 있게 느끼면서도, 또한 미모도 가치 있게 여기는 이들까지 쫓아낸다. 무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것에만 배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속성이 동일하고, 미모에서만 동일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쪽을 고르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우선성이 무엇이건 간에, 이것은 성립한다. 즉, 스스로를 비매력적으로 만드는 사람은 그 사람을 오직 덜 중요한 측면 때문에만 가치 있게 여길 사람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과 함께 미모도 보는 사람까지 물리치게 된다. 그리고 설사 상대가 자신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상대는 연인이 미모도 매력적이었을 때보다 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이것까지 거부하려면, 감각적으로 즐거운 것에 신경 쓰는 것은 적극적으로 나쁘다는 명제를 옹호해야 한다. 즉 감각적 즐거움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미에 신경 쓰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미라는 것은 그림이나, 석양이나 사람에 있건 같은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 안에 있는 미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은 미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190 물론 미는 낮은 우선성을 갖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배가 고프거나 부당하게 대우받거나 불행하거나 할 때 미에는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쓰는 것이 도덕적으로 좋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다른 것과 함께 미도 가지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삶의 기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미에 신경 쓰지 않지만, 그것은 그들이 미학적으로 무감하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190 미학적으로 무감한 것은 실제로 사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미덕인 것도 아니다. 철학이나 풋볼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미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섹스의 감각적 즐거움에 관해서 마찬가지 이치가 성립한다. 섹스는 영혼의 사랑보다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에 관하여 신경 쓰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는, 섹스가 실제로 나쁜, 적극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논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단지 다른 것들보다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적극적으로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감각적 즐거움이 좋은 것이라면 예쁜 옷을 입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우선순위에 맞게 노력을 들이고 그렇게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일을 거부하는 것은, 섹스에 관심 있는 남자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개인적 선호일 뿐이고, 페미니스트 이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비록 다른 목적을 위하여 감각적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좋을 수는 있지만, 다른 달성할 목적이 없다면 감각적 즐거움 자체를 포기하는 데에는 도덕적으로 그 자체로 좋은 바가 없다. 남성이 여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신경 쓴다는 사실 자체를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으로 합당하게 여길 수가 없다. 다른 것들에 대해 더 신경을 쓰기를 합당하게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해서 엄청난 일반적인 혼동이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름답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는 불공정한 면이 있다.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똑똑하게 태어났다는 점, 그리고 부모들이 그들을 더 즐거운 사람들로, 더 강한 사람들로 양육했다는 데에는 불공정한 면이 있다. 이것을 덜 부정의하게 만들 방도는 없는지는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분배에 있어서의 우주적인 부정의의 해법으로, 그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입증하려고 하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또는 그것들이 오직 사회의 악 때문에 중요하게 된다고 여기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미가 중요하다는 것은 사회의 악이 아니다.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미가 문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성품이나 재치로 미모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만회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첫 인상에서 미모가 힘을 발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미는 하나의 가치다. 즉 사람들이 즐겁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두 낯선 사람이 있을 때, 즐겁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일단 끌리는 것은 합당하다. 한 사람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고 다른 사람은 갖고 있지 않을 때,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에 어떤 미덕이 있는가? 만일 첫 인상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192 간단한 사실은,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비매력적으로 스스로를 만드는 것은 모든 성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성적 관심도 있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의 개인적 성향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합당한 페미니스트 정책으로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을 매혹하기를 원하고 그렇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고의적으로 비매력적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남성들이 여성의 미모를 신경 쓴다는 것은 남성들의 도덕적 부패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감각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가장 고차적인 성적 관계의 표지가 아니다.
5. 패키징
193 예쁘게 차려입고 미를 꾸미는 것은, 패키지화하는 것, 그리하여 여성을 상품으로 전락시켜서 비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선, 꾸민 외모에 관심이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보자. 변화된 바 대로가 아니라 원래 그대로가 사랑받아야 한다는 것 소리는 타당한가?(What about the general idea of being wanted for what you are, rather than what you have become?)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변화된 바가 이제 지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은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이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줘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의 커다란 이점이란 무엇인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무엇일 수도 있다. 이기적이고, 무관심하고, 지루하고, 공부를 많이 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부적절하게 행동하고, 문맹이고 할 수도 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원래의 개선되지 않은 판본을 좋아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이 맥락에서 ‘당신이 그대로 인 바’가 무엇으로 의미되었던 간에, 그것을 선호해야 할 선험적인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도덕이나 교육에는 개선을 찬성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자연적 미모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고. 이 지점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보수주의적 세계에서 동맹자가 된다. ‘자연적 미’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일반적 표제 하에 많은 것들으 합쳐 희미하게 만드는 소리가 된다. 그 각각을 구분해보자.
첫째, 페미니즘에서는, 사람들이 그 본성상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동등하게 아름답다는 낭만적인 이념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현재의 취향에 순응하도록 북돋우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바로 기각될 수 있다. 어떠한 가능한 규준에 의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거짓이다. 규준이 변하며 어느 누구라도 아름답다고 판정할 수 있는 어떤 규준이 있다고 논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거의 확실히 참이 아니지만) 그것은 무관하다. 오백년전의 취향에 따라 아름다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오늘날 추하다고 생각되는 데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미의 기준을 모두를 아름답다고 하도록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문의 여지 없이 우리는 더 큰 유연성을 목표로 해야 하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관념 그 잔체를 전적으로 제거하지 않고서는 모든 사람을 아름답다고 할 정도까지 그 유연성을 늘어뜨릴 수는 없다. 어떤 것도 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미의 규준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해야 할 바는 그들이 있는 그대로를 아름답다고 살마들이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근거로,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여성에게 그러지 말라고 권고할 수는 없다.
자연적 미에 관한 두 번째 이념은, 거칠게 말해서, 자연은 개선할 수가 없으므로, 따라서 그저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에 대한 보증되지 않은 신앙이다. 물론 사람들이 너무 분을 많이 바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요점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일부 실패한다는 점은, 그러한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미가 보는 자의 눈에 있다는 것은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바라보는 자가 좋아하는 바가 무엇인지 언제나 발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바라보는 자가 좋아한다면, 머리를 염색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바라보는 자의 눈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을, 인위적인 미는 거짓된 가장이라는 이념이 있다. 이것은 남성이 염색하고 속눈썹 붙이고 화장하거나 뽕브라를 한 여성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가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경우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은 성형이나 머리 자르기나 펌이나 살을 빼거나 하는 것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오래 가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반대하지 않고 전자는 반대하는 것은, ‘자연적인’ 사람은 실재하는 것이고, 실재하지 않은 것은 사기적인 것이라는 또다른 혼동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성형이 덜 영구적인 경우는 어찌 판단할 것인가? 이 경우 남성은 속임을 당했다고 느낄 자격을 갖고 있는가?
195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에는 남성들이 결혼을 하기 전에 이것들에 대해 알아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자연이 그녀를 조금 덜 유리하게 태어나게 했을지라도 그녀 스스로를 좋게 보이게 할 줄 아는 여성을 만나는 남성은, 그렇게 할 줄 모르는 여성을 만나는 남성보다 더 나은 것이다. 미는 당신이 누구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가의 문제이다. (beauty if not a matter of what you are, it is a matter of what you look like) 미모가 진리라는 이념이, 낭만적인 정신에 얼마나 깊이 단단히 박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헛소리다. 그리고 속이기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꾸밀줄 아는 여성을 만나는 남성은 사실 더 나은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 미와 달리 꾸미기 기술은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야기는, 여성은 그들이 있는 그대로에 만족해야 한다는 논의다. 여기서 또다른 명제에 부딪힌다. 즉, 외모에 들인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라는 이념 말이다. 즉,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미모를 가꾸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느냐의 질문은 페미니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성이 종속적인 지위에 있어 미모만이 남성에 의존하여 경제적 생활을 꾸릴 때에는 미를 꾸미는 것이 그러한 종속적 지위에서 파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고쳐야 하는 것은 그러한 종속적인 지위이고, 그리하여 경제적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독립성이 확보되면, 자기 자신의 가치순위에 따라 노력을 들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다. 페미니스트의 관심사는 그가 주고자 하는 것보다 여성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그러한 지위에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각자가 얼마나 일반적으로 요구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페미니즘과는 관련이 없다.
감각적으로 즐겁게 하기에 기울이는 노력의 문제는 이전 절의 주된 논지 중 하나로 되돌아오게 한다. 즉 아름다움은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가 상관없이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방을 안락하게 꾸며 사람들이 있기 좋게 만드는 것에 신경 쓴다면, 그들 자신이 쳐다보기에 좋게 꾸미는 것에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수고해서 할 가치가 있다면 파티에 예쁘게 꾸미고 나가는 수고를 들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얼마나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가치가 다르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 선호에 따라 다른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아름답게 되는 것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그리고 파트너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 다를 수 있겠다. 그러나 어쨌건 미학적으로 무감하거나 감각적으로 무감한 것에는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좋은 바는 전혀 없다.
페미니즘은 성별 정의에 관한 것이지, 한 선호를 다른 선호보다 우선시하는 데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과 청교도주의를 혼동한다. 청교도주의는 청교도주의로 불려야지 페미니즘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
197 6. 섹스 그 자체, 그리고 대상 질문
페미니스트가 여성적인 장식물들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대하는 논변은 이때까지 두 단계를 취해왔다. 첫째로, 남성이 여성 안의 미를, 다른 것과 함께 신경 쓰는 것은, 그들의 우선순위가 올바른 한, 그 자체로 아무런 잘못된 바가 없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매력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을 지지하는 페미니즘적 논변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이 끌어들일 사람은 미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은 페미니스트의 원리에 기반한 것은 아닐 터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일부 사람들은 미에 관하여 신경을 많이 쓰며, 이것은 도덕적으로 의문스러운 지점까지 지나치게 많이 신경 씀이 없이 가능한 행동이다. 그리고 여성들이 미학적으로 민감한 사람을 즐겁게 하기를 바라는 것은 여성에게 비합당한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녀를 그러한 방식으로 즐거운 존재로 만드는 데 노력을 투여하는 것은 비합당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모두 반대방향으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페미니스트들은,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감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남성을 고를 입지에 있는 것이 여성들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논변들의 처음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도전되지 않은 채로 놓아두었던 가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비록 감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성적 관계에서 얼마간의 비중을 가지기는 하지만, 여하한 받아들일 만한 관계에서 주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가정 말이다.
이것은 미에 초점을 둔 감각적인 즐거움의 정도가 주요하게 여겨지는 관계에 관한 질문들까지 함께 다루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인 대회, 핀업 걸, 에스코트, 스트리퍼, 매춘 등등 말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여성이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를 비하하고, 남성을 위한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고 비판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은 구체자particulars에 관한 것이다. 특정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 특정한 여성의 활동. 그리고 특정한 관계들. 그러한 상황이 모든 여성들의 활동이나 관계로서 제시된다면, 가능한 방어는 없다. 그러한 주장은 여기서 논의되지 않는다. 쟁점은, 우리가 그러한 제한된 이해관심과 활동의 특정한 사례들에 항상, 여건에 관계 없이, 그리고 페미니즘의 적절한 관심이 그것들 모두에 반대하는 것인지 상관없이, 항상 반대하여야 하는가이다.
논의의 시작을 위하여, 그 사안을 매우 일반적으로 바라보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의 특정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 특정한 기술에 의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 유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과의 경쟁에 진입하는 것, 그리고 특정한 능력들을 활용하여 소득을 버는 것에는 어떠한 것도 내재적으로 그릇된 바가 없다고 생각함이 꽤나 분명하다. 예를 들어, 어떤 가수가 눈부신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콘서트에서 들었다고 하자. 그 가수 남성은 그 피아니스트 여성과 콘서트를 함께 여는 것에 대하여 상상을 하며,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넘어서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만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그녀가 이 제한된 음악적 관계에 기꺼이 진입할 것을 희망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녀는 기쁘게도, 그녀의 다른 측면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콘서트를 열어 기꺼이 연주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녀는 경쟁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리고 확실히 그녀는, 음악을 듣는 것을 즐긴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함으로써 그녀의 생계를 꾸리려고 할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관한 꽤나 많은 것에 상당히 밀접한 유비가 명백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은 아름다운 여성과의 섹스에 대하여 상상한다. 그리고 발견한 아름다운 여성을, 오직 섹스만을 염두에 두고 만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여성은 그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녀는 순전히 성적 관계에만 기쁘게 진입할 수도 있다. 그녀는 미를 겨루는 경쟁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것은 아마도 여성들의 행렬을 보는 것을 즐거워하는 남성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그들은 스트리퍼나 매춘부로 남성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생계를 꾸린다. 그러므로 만일,ㅏ 남성이 이러한 것들을 원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남성과 동의하여 그러한 일을 하는 여성들에 관하여 무언가 나쁜 것이 있다면, 왜 그들의 음악적 능력에만 곤심을 두고서 음악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그러한 이해관심에 합치하여 행동하는 음악가, 그리고 그러한 연주 행위에 의하여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것이 없는가? 왜 공동의 지적 이해관심에 관계를 기초지우는 것은 수용할 만한 일인데, 섹스를 위한 공동의 소망에 관계를 기초지우는 것은 받아들일 만하지 않은가? 왜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상이 있어야 하지만, 얼굴을 잘 꾸미는 것에 대하여는 상이 있어서는 안 되는가? 왜 사람들의 귀를 아름다운 소리로 매혹시키는 일에 돈을 받는 것은 받아들일 만한데, 스트립쇼와 매춘으로 남성들의 환상을 기쁘게 충족시켜주는 것에 돈을 받는 일은 받아들일 만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것들이 여성을 비하시킨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현재에는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여성들이 비하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 주위를 둘러싼 여건이다. 즉, 제재를 받지 않거나 상업적으로 동기화된 섹스에 관하여 무언가 나쁜 것이 있다는 관념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여성들은 이러한 일들을 함으로써 비하되는데, 그것은 그 일에 대하여 공중이 경멸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생계를 꾸릴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일단 이 일을 하게 되면, 그들의 약한 입장으로부터 귀결하는 구체적인 비하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이나 육체노동과 같은 일들도 사회적 태도에 의해 비하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사안들의 경우에는 우리는 사람들을 일하지 않도록 설득하기보다는 비하 그 자체를 제거하였다.
200 왜 우리는 매춘과 같은 사안에서도 역시 비하와 싸우지 않고, 남성들은 이것들을 원하지 않고 여성들은 그것들을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늘 그렇듯이, 옹호해야 할 편견이 있을 때 변명이 번성하게 된다. 섹스는 돈에 의해 값싼 것으로 전락한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는가? 간호는 자주 사랑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호사들이 그들 스스로를 값싸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걸로 그들의 생계를 꾸린다고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그들의 기술을 항상 활용할 수 있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만 간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춘에 반대하기 위한 논거는 무엇인가? 사랑 없는 섹스를 하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고 이야기된다. 그 말은 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없는 섹스를 결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는 논거는 조금도 제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면, 저녁 식사 파티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는 것이 가장 즐거운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여건에서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춘은 오직 결혼에 대한 부르주아의 이상과 함께 오는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의 이상이 사라지면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신앙의 문제이다.
음악, 간호, 그리고 식사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유비는, 성적 맥락에서 활동이 불승인되는 것들이 비성적 맥락으로 옮겨지면 완전히 수용할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오직 섹스만이, 적절한 제재에 의해 순수화되지 않는 한 비하하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즉, 결혼이 아니라면 적어도 사랑은 있어야 비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관념에 저항하기보다는 이를 받아들인다면, 왜 섹스만이 내재적으로 그토록 다른지를 보여주도록 이유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받아들일 만한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섹스에 대한 이 튺수한 태도에 대한 유일한 이치에 닿는 설명은 역사적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정당화justification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즉, 섹스와 연관된 마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감각적 즐거움을 내재적으로 악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경향과 결합된 역사적인 경향인 것이다. 극히 소수의 페미니스트들만이 이러한 관념들을 영속화시키기를 바랄 것이다. 게다가, 섹스를 결혼이나 그와 동등할 정도로 헌신된 관계에만 한정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특별히 강하게 반대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 도덕적 요구는 거의 확실히, 남성이 여성의 성적 충실을 확보하여 그들의 자손의 동일성을 확실히 하려는 데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페미니스트들이야말로, 사랑과 헌신의 휘장이 없는 섹스는 그릇되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어야 한다.
201 그것이 참이건 아니건, 그러나, 성적 관계가 삶의 다른 모든 것과는 래디컬하게 다르게 대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수용할 만한 이유들을 제시할 책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들은 제시될 수가 없다.
왜 페미니스트들이 사람들이 순전히 성적인 이해관심을 서로에 갖는 것, 그리고 성적 속성의 활용과 증강에 의해 생계를 꾸리는 것에 반대하여서는 안 되는가를 보여주는 다른 이유가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과거의 여성들이 그들의 재능 중 소수의 것만을 활용하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에 항상 반대해왔다. 그래서 여성들이 그들의 능력을 완전히 다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왜 미나 남성을 즐겁게 하는 재능에 대해서는 차별하면서, 그 여성들이 덜 잘하는 다른 일을 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재능이 무시되고 쓰이지 않도록 강제할 자격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페미니즘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기회의 제한은 여성에 대한 부당대우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섹스를 상업화하려는 여성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페미니스트의 명령이나, 남성들은 어떠한 여성에 대해서도 순전히 성적인 관심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명령은, 위장된 형태로 여성의 억압이 지속되도록 하는 명확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성들이 남성을 성적으로 즐겁게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모든 능력을 거기에 쏟을 때라도 말이다. 다시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협상 상황의 불공정성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