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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립물] 애매함과 모호함

by 시민교육 2018. 4. 4.

 

1. 애매모호한 것은 명석판명하지 않은 것

 

한국어에서는 애매모호하다는 말을 많이 쓰지만, 영어에서는 이게 복합어로 되어 있지는 않다.

 

무언가 명석판명(明晳判明)하지 않은 것을 애매모호하다고 한다.

 

관념의 성질에 관한 데카르트의 진술을 따라, Charles Sanders Peirce, Peirce on Signs. 김동식·이유선 옮김, 퍼스의 기호학, 나남, 2008, 278-279면은 명석한 관념(ideas)이란 너무 잘 이해되어서 대면할 때마다 알아차려지고, 그래서 다른 어떤 것이 그것으로 오해되지 않을 그러한 관념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판명한 관념은 명석하지 않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은 관념이라고 정의된다.”

 

애매모호함의 판단 단위는 진술(statements)이다. 진술이 의미론적으로 어떤 명제(proposition)으로 고정되는 과정에서 명석판명성이 그 진술을 주고 받는 맥락에서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다면, 그 진술은 비합당하게 불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2. 애매함과 모호함

 

이제 이 비합당한 불명확성은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애매함(ambiguity)이다. 애매하다(ambiguous)는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다.

 

"He went to the bank"는 진술은 애매하다. 그는 은행에 갔을 수도 있고 둑에 갔을 수도 있다. 주변 문장들이 그 맥락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으로든 해석될 수 있다. 만일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를 가려낼 기준을 그 주변문장들이 제시해주고 있지 못하다면, 그 진술집합들은 애매하다.

 

다른 하나는 모호함(vagueness)이다. 모호하다는 것은 그 상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상이 분명치 않으면 경계가 흐려진다.

 

"키가 매우 작은 사람은 현역 군복무를 면제받는다"는 진술은 모호하다. 왜냐하면 군복무 적합성 판정을 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명석성이 확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6cm는 매우 작은 것인가? 153cm는? 이런 문제는 이 맥락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모호함은 비합당한 불명확성이다. 반면에 "키가 매우 작은 사람과는 소개팅을 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비합당하게 불명확하지는 않다. 그 정도의 모호성은 그 진술을 주고받는 담화의 맥락에서 용인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퍼스가 말한 바의 명석함(clearㆍklar)은 애매함과 대치되는 것이고 판명함(distinctㆍdeutlich) 은 모호함과 대치되는 것이라고 거칠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애매하지 않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오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판명성은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도록 경계가 잘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애매함과 모호함은 불가피하지만, 인간 실천의 각 맥락에서 합당한 범위 내에서만 허용

 

물론 인간의 언어는 언제나 애매함과 모호함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는 언제나 맥락 적합성을 가지고 만들어지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맥락에 따라 요구되는 합당한 명확성의 정도가 다르게 된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대화상대자에게 말한 "오늘 너무 춥다"는 합당한 정도의 명확성을 갖춘 진술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신이 낮은 기온으로 체온상 불편을 심히 겪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 특히 다른 날에 비해 심하다는 표출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면서 이것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추운 날씨라는 의도로 말하는 경우에도 이것은 합당한 범위 내에서만 모호하다. 특히 그 사람이 같은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춥거나 춥지 않은 날씨의 기준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회사의 단체협약에 "너무 추운 날은 하루 휴무한다"고 되어 있다면 그것은 합당한 명확성의 정도를 결여한 진술이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너무 추운"이라는 것이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날씨의 경계를 두고 어마어마한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X라는 음식을 만들 때에는 물이 끓고 있는 동안에 소금을 적당히 뿌려라"는 이미 많은 배경지식을 공유하고 있는 전문요리사들 사이에서는 합당한 정도의 명확성을 갖춘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요리 초보자들에게는 "물이 끓고 있을 때 적당한 시기에 소금을 적당히 뿌려라"는 말은 합당한 정도의 명확성을 갖추지 못한 진술이 된다. "가스불을 최대한으로 올린지 1분 30초가 지난 다음에 10mg의 소금을 넣어라"는 초보자에게도 명확하다.

 

그래서 어떤 화행(speech act)에서 제시된 명제의 의미론적 명확성은, 그 화행이 발해지는 생활세계의 맥락에 의해, 평가되는 법이다.

 

4. 합당한 정도의 명확성 달성의 부담(burden of achieving reasonable clarity and distinctivity) 

 

합당한 정도의 명확성을 갖추지 못한 진술이 제시되었을 때, 생활세계 안의 사람들은 추가적인 의사소통행위를 통해서 그 진술의 의미를 더 좁혀 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씩의 둑과 은행이 모두 중앙공원 근처에 있는 도시에서, "마이클은 오늘 bank에 갔다"는 말을 누군가 하면, "어느 bank에 갔단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고, 그에 대해서 "저금하는 대출하는 bank말이야"라고 답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발화자에게 말의 의미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석명을 구할 수 있고, 적어도 발화자가 언어를 통해서 청자와 정당하게 상호작용하고자 한다면, 그 석명에 발화자는 답할 의무가 있다.

 

필요한 수준의 명석판명함이 획득되지 못했다는 것은, 제시된 것과 같은 개념과 기준으로 다른 결론이 함의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다른 결론이 함의될 수 있다면, 논증대화의 참여자는 왜 동등하게 함의될 수도 있는 다른 결론은 배척되는가를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을 할 때는, 자기만의 사적인 직관이 아니라 공적으로 검토될 수 있는 추가적인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이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내세운 주장이나 규칙은 자의적 기초 위에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인간 실천상에서 명석판명함의 요청은 추가적인 근거 제시 의무’를 발동시킴으로써, 제시된 개념과 기준이 바로 그 결론을 함의할 수밖에 없음을 해명해달라는 요청이다. 

 

반면에 정당하게 언어적으로 상호작용할 생각이 없는 화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은행강도가 은행에 들어왔다. 총을 겨누면서, "움직이지 마! 꼼짝도 하지 마!"라고 한다. 그런데 하필 그 때 손님 a가 떨어진 동전을 줍느라 몸을 부자연스럽게 숙이고 있었다. 손님 a는 그 상태로 꼼짝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 힘이 빠져서 그 자세를 거의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숙인 고개를 들어 은행강도에게 물었다. "저, 자세를 바로 해서 가만히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은행강도는 "너 이 색히, 움직였어, 머리도 움직이고 입술도 움직였어!"라면서 탕 하고 총을 쏘아서 손님a를 죽였다.

 

애초에 은행강도가 "꼼짝도 하지 마!"라고 한 것은 불명확했다. 은행강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큰 움직임을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숨을 쉬면서 가슴이 들썩들썩 하는 것조차도 금했는지, 아니면 숨 쉬는 불수의적인 것까지는 괜찮지만 손가락을 움직인다거나 하는 수의적인 움직임은 모두 금한 것인지가 불명확하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명석판명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자, 그냥 자신이 내세운 규칙에 위반되었다는 이유로 총을 쏴버린 것이다.

 

문제는, 정당하게 언어적으로 상호작용한다고 명목상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그러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이 문제되는 경우는 특히 국가가 공적 권위를 활용하여 결정이나 명령을 발하는 화자일 때이다.

 

국가가 이를테면 헌법재판에서 과잉금지원칙에서 법익균형성을 이야기하면서, 정확히 같은 이론틀을 가지고서, 완전히 상반되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면, 국가는 입헌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 부과된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시민들은 단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내 마음 속의 저울'에 의해 법익의 무게가 달려지고 그냥 어쩔 때는 저렇게 결정되고 또 다른 때에는 이렇게 결정된다고 하는 노예상태에 놓이게 된다.

 

국가는 또한 입법부에서 "저속한 표현은 인터넷상에서 금지된다"고 법으로 정하는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이 때 "저속하다"라는 것은 개인의 포괄적 신조에 따라 전혀 심리적으로 다르게 포착되는 말로, 사람들은 'A는 저속합니까?', 'B는 저속합니까?'라고 계속해서 물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그 법률의 문언이나 확립된 판례상의 법리가 요구되는 정도의 명석판명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도, 국민들은 노예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명석판명함이라는 기준이 실천적으로 가장 요청되는 곳은 바로 국가행위가 문제될 때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권위를 갖고 있는데, 그 권위를 행사할 때 국민의 석명요구를 무시하게 된다면, 국가는 앞서 거론한 은행강도와 같은 깡패짓을 하는 데 불과하기 떄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