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당 논문은 형사사법의 철학에서 흔히 견지되는 두 가지 입장인 응보주의와 해악 원리가 함께 견지될 수 없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 논지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완전히 엄밀하게 논증이 성공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쨌거나 해당 논문은 가상적 사고실험에서 처벌이 해악을 방지하는 효과가 없는 경우를 전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이 사고실험에서 다룬 사안의 경우 해악을 방지하는 효과가 없음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적어도 사고실험의 논지가 성립하지 않는 현실에서는 응보주의와 해악 원리가 우연적으로 함께 갈 수 있다고 논하는 길이 적어도 열려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연적으로 응보에 맞는 것이 해악 방지에도 기여하는 경우만을 주로 발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론적으로는 두 입장이 국가의 처벌권 행사에 있어 상이한 방향을 가리키는 경우들이 있고, 이를 정합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이것은 처리해야 할 하나의 난점이기는 합니다.
이것은 법학 학부 과정에서 형사처벌의 정당화에 응보주의와 예방주의를 함께 묶어서 응보가 책임의 유무와 책임의 상한을 결정하고 예방이 그 상한의 범위 내에서의 적절한 지점을 짚어낸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큰 문제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즉 응보주의와 예방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 않는 것이며, 이 둘을 섞이게 만들려면 어느 한 쪽을 크게 수정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수정은 수정된 이론을 거의 실제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변경시키는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이 논문이 위와 같은 결합 불가능성 논지만을 논의하였다면 흥미가 별로 없는 논문이었겠지만, 해당 논문은 해악 원리의 여러가지 판본을 소개하고 있고, 그 판본의 장단점이나 함의도 논의하고 있어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3. 또한 응보주의에는 의무론적 판본과 목적론적 판본이 있다는 점을 잘 짚고 있습니다. 다만 의무론적 판본의 응보주의를 제대로 해명했는지에는 조금 의문이 있습니다. 목적론적 판본에는 응보 원리의 충족을 비개인적 가치(impersonal value)라고 보고 그 비중에 맞는 가치 최대화나 가치 균형의 달성을 추구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의무론은 비개인적 가치이든 개인적 가치이든 어떤 가치를 최대화한다거나 균형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므로, 응보 원리의 충족을 그저 모든 응보론에서 비개인적 가치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오도하는 설명인 것 같습니다.
4. 해당 논문은 응보주의와 해악 방지에 초점을 둔 예방주의의 두 조류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응보주의와 예방주의가 처벌의 정당화나 처벌권한 행사의 한계를 생각하는 데 유일한 관점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형태로는 함께 묶이지 못하는 이러한 이론들이 각각의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호소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형사사법 철학에서 제시될 수 있는 대안은, 그 직관적 호소력을 제대로 포착해내는 제3의 이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정당한 처벌에 관한 관계적 이론으로 칭할 수 있는데, 스캔론과 같은 계약주의자들이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올해 하반기에 출간될 번역서인 스캔론의 <관용의 어려움>은 한 챕터를 할애하여 처벌이론을 다루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