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존 오버딕, "위험방지권을 향하여"

by 시민교육 2021. 9. 17.

 

오버딕_위험방지권을향하여.hwp
0.07MB

 

해당 논문은, 위험에 대항하는 권리인 위험방지권(right against risk)의 근거와 그 내용을 밝히는 논문입니다. 

이 논문은 앞서 소개한 애드리언 플래커니가 비판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만, 요약번역자의 견해로는, 이 논문이 보다 생산적이고 체계적 논의를 가능케 하는 틀을 담고 있고, 해악 자체와 그 해악 위험을 구분하는 용어법과 이론적 입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플래커니의 논문은 첫째로 위험 증가의 사안 중에서, 의도적으로 해악을 입히려는 시도로 인해 생긴 위험 증가만을 다루고 있어서 그 논의의 범위가 좁은데다가 둘째로 '존엄 이익'이라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자유와의 형량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개념을 중심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래커니는 오버딕의 논증이 위험 위협의 심대한 측면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뉘앙스적인 비평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해악을 가하는 것 그 자체를 의도로 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 위험 증가에 관한 별도의 분석을 요하지 않는 규율 체계로 이미 해결이 가능해서 실익이 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 미수를 벌하고 있는 형법이 플래커니와 같은 이론적 체계를 굳이 요구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위험에 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적으로 해악을 입히려는 시도, 즉 해악 입히기의 시작 단계의 행위에 대한 규율보다는, 다른 면에서는 생산적이고 통상적인 행위이지만 다른 구성원들의 삶에 위험을 증가시키는 행위에 대한 규율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비밀성이 보호되는 이메일을 사용하는 것부터, 그저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행위까지 아주 광범위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 비밀성의 요구가 국가안보와 상충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행위가 감염병을 전파시킬 수 있어서 건강 및 생명의 존중과 상충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상 이러한 자유 vs 안전의 사안에서, 체계적인 분석의 이론적 도구가 없다면 쉽사리 안전의 손을 들어주고 마는데, 이것은 테러방지법에서 그저 대테러 방지에 필요하다면 이메일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조항이나 방역을 위해 집회의 자유를 1년 반이 넘는 장기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현실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 논문은 받아들일 만한 선택지들의 제거라는 측면에서 위험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자유 역시 선택지들이 열려 있음의 형태를 취하므로, 자유 vs 안전의 사안을 자유의 전체 체계 강화라는 하나의 틀에서 다룰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닦아줍니다. 

 

이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이 논문은 위험방지권이 확립될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일정한 위험한 방식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을 요하는 청구권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라는 답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오버딕은 "권리 보호를 보증하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보호할 가치가 있어야만(be worth protecting) 한다. 그리고 그 면에서, 권리가 보호하는 것은 권리 보유자의 이익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이익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호할 의무를 근거지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중요해야 한다."는 것을 가장 토대적인 원리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험에 적용하여 보면,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되는 것에 어떤 이익이 있고, 그 이익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의무를 근거짓기에 충분히 중요하다면, 위험방지권은 확립된 것이다."라는 형식적 기반을 먼저 닦습니다.

 

그 다음 그런 보호가치 있는 중대한 이익으로 바로 '받아들일 만한 선택지들이 열려 있음'이라는 자율성의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이익, 간단히 '자율성 이익'을 지목합니다.

 

"선택지들의 받아들일만 함, 그래서 그 규범적 활용가능성은, 그 선택지 행사가 안전하리라는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지가 행사된다면 안전하리라는 사실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에게 비밀스럽게 위험을 부과하는 일은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자율성을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그런 위험 부과는 그 사람이 알건 알지 못하건 간에 그 사람의 받아들일 만한 선택지들을 좁히기 때문이다."

 

다만 위험이 자율성을 감소시킬 수 있는 것이지, 필연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위험 부과가 그 위험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의 자율성도 감소시킨다고 보는 것은 그럼직하지 않다. 어떤 테러리스트가 런던 기차에 폭탄을 설치한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버몬트에 사는 사람의 선택지들에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친다. (...)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연관된 것으로, 일부 위험은 그 확률이나 규모 면에서 지나치게 사소하여 자율성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세 번째 이유는, 일정한 위험들은 그것들을 수반하는 활동의 가치에 전제되어 있거나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악 등반에 내재한 위험은 그 활동의 가치에 부분적으로 구성적이다."

 

이제 이러한 단서 하에서 위험방지권 자체가 확립됨은 보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위험방지권을 별도로 확립할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확립한다 하여도 그 내용은 어차피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로 다 흡수되는 내용만 가질 뿐이므로 잉여적일 뿐이라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서 오버딕은 잉여적이지 않다고 답합니다. "왜냐하면 위험방지권은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나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에서 전혀 표현되지 않는 자율성의 특정한 측면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와 위험방지권은 다음과 같이 대조됩니다.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는 실제로 사람이 선택하는 선택지들에 또는 보다 수동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것에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해로운 행위가 아니었더라면 처했을 입지보다 실질적으로 더 나쁜 입지에 놓이지 않게 하는 규범적 보호를 제공한다. 위험방지권은 이와는 달리, 사람이 처했을 입지가 무엇인가라는 반사실적 탐사를 하는 대신, 사람이 처했을 수 있는 입지가 무엇인가라는 양상적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중요한 것은 활용가능한 선택지들이지, 실제로 선택한 선택지가 아니다. (또는 실제로 선택했을 선택지가 아니다.) 위험방지권은 그러므로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에 삼켜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플래커니처럼 위험방지권을 그저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의 한 예라고 말하는 것은 오도하는 일이 된다고 합니다.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는 그 자체가 구체적 권리라고 전형적으로 생각되지, 많은 그런 권리들의 중심이 되는 복합적 권리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위험방지권은 다른 여느 권리만큼이나 근본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위험방지권이 보호하는 고유한 이익인 자율성 이익을 식별하였기 때문에, 해악을 입지 않을 권리를 보호하는 도구적 권리라는 개념을 발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론적 장점입니다. 그런 도구적 기능만 하는 권리를 도덕에서 인정하는 것은, "권리 증식이 논리적으로 끝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다시금, 이 그림에서는, 충분히 중요한 이익에 권리들에만 규범적 보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들 자체가 권리들에 의해 보호되며, 이 추가적인 권리들은 다시 더 추가적인 권리들에 의해 보호될 것이다. 그런 고차적 복제는 무한"하게 된다는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되고, 또한 권리가 그저 전략적이고 간접적인 지침이 되어 사소화되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야 할 이론적 구성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위험방지권의 자율성 이익이라는 고유한 이익에 근거를 정초함으로써 위험이 해악의 대용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도구적으로는 유용하지만 본유적으로는 도덕적 의의가 없는 것이라는 비판을 불식시킵니다.

 

그 다음으로 오버딕이 다루는 것은 위험방지권의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매우 불확정적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즉, "모든 위험은 권리에 의해 금지되기에 지나치게 불확정적인 것에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험 평가는 준거집단에 의거해서 산출되는데 이 준거집단은 무한정 다시 설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험 평가 자체가 맥락에 따라 달리 선정한 준거집단에 좌우된다는 것은 위험방지권의 내용을 불확정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준거집단에 자신의 행위자성을 발휘하여 속할 수 있음' 그 자체가 바로 위험방지권의 핵심 내용인 자율성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토바이 운전자들의 치명률과 헬멧을 쓰기로 선택하는 오토바이 운전자들의 치명률은 다르"지만, 그래서 준거집단을 '오토바이 운전자'로 잡는지 '헬맷을 쓰는 오토바이 운전자'로 잡는지에 따라 위험이 달라지긴 하지만 이것은 위험방지권의 내용의 확정성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어떤 오토바이 운전자가 헬멧을 쓰기로 선택한다면 그 사람은 헬멧을 쓰지 않는 오토바이 운전자' 준거집단을 버리고 '헬멧을 쓰는 오토바이 운전자” 준거집단에 들어가서, 오토바이 사고로 인한 사망의 위험을 낮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어떤 준거집단에 속할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의 선택지들을 나타내며, 위험방지권이 권리보유자의 받아들일 만한 선택지들을 보호하는 한, 위험방지권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잠재적 준거집단들이다. (...) 그러므로 위험방지권은 위험에 처하는 임의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여러 준거집단들을 분리함으로써 확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양대 비판인 잉여성, 불확정성 비판을 모두 공박하고 나서, 이제 대미를 장식하는 논의로, 위험방지권의 내용을 규정하는 일로 들어섭니다. 

 

오버딕은 위험방지권의 내용은 곧 위험방지권 침해란 무엇인가의 해명에 의해 그 경계가 그어진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위험을 부과"하는데 "어떤 위험은 사소하고 다른 위험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밀접한 관련성이 없지만, 사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정말로 꽤나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또 다른 위험도 있"어서 허용되는 위험과 불허되는 위험을 가르는 기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권리의 인정은 모든 위험 증가 행위가 권리 침해가 되어버림으로써 사실상 권리의 사소화나 아니면 행위 마비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의 절대적 규모에 의해 허용과 불허를 가를 수는 없는데, 사소한 위험이라 할지라도 단지 다른 사람들이 해악을 입을 확률을 증가시키는 것이 즐거워서 그렇게 한다면 불허될 것인 반면에, 큰 위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더 큰 위험을 막기 위해서라면 허용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버딕의 논의는 다분히 스캔로니안적 계약주의의 구조를 갖는데, 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율성을 감소시키는 위험 부과는, 위험을 낳는 목적이 그 위험에 영향받는 사람들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한 정당화된다."(authonomy-diminishing risk impositions are justified so long as the ends that produce the risks could be endorsed by those who are subject to them)

 

예를 들자면 "자동차 문화에서 살아가기가 자율성에 부과하는 위험과 끼치는 충격은 현대의 삶에서는 단순히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위험을 생성하는 목적을 지지할 수 있는 정도만큼, 그 위험은 그저 불가피한 것은 아니고 허용되며 위험방지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제안의 핵심 특성은, 문제되는 위험 부과는 그 위험의 영향을 받는 각자에게 정당화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 각각이 문제되는 위험이 배제하는 선택지들에 대해 권위를 보유하기 때문이다. 문제된 위험이 배제하는 선택지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 경우에, 그 위험의 영향을 받는 개인들의 자율성은 감소되며, 다시금 그러한 일은 그들에게 정당화될 수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작동하는 이념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실을 대가로 자신이 보유하는 자기 삶에 대한 권위 중 일부를 양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일부 위험들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Put simply, some risks are worth taking)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권위 모두를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양도할 수는 없으며, 계속 보유하는 권위는 다른 사람들이 지는 적정 주의의 의무의 근거가 된다.-그들의 행동은 남아 있는 권위에 반응적이어야만 한다. 이 가상적 지지 규준이 충족될 경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하지 않았다면 보유할, 자신과 자기 선택지들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한낱 권력이 아니라 권위의 일부를 양도하는 것이다. 이 정당한 권위의 양도로써 허용되는 위험을 인수하는 것이다.-그것은 자기 선택지들의 배제를 허용되도록 만든다. 더군다나, 사람이 자신의 권위를 동의한 경우에만 그에 대한 위험 부과가 허용된다. 이런 면에서 위험방지권 침해는 권위 남용에 있다."

 

이러한 해명 하에서 오버딕은 자신의 제안의 "가장 근본적인 요지는, 위험방지권 침해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자기가 행사할 권위로 보는 잘못된 추정 하에서 행위하는 일을 포함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위험방지권 침해는 자기가 행사할 권위가 없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지에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다. 설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부 권위를 양도한다고 하더라도 위험방지권을 침해하는 위험 부과는 이 사실을 무시한다.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 감소시키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을 부과하는 것이 위험에 처한 이들의 자기 삶을 통제할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때때로 이것은 정당화될 수 있고 때때로 정당화될 수 없다. 정당화될 수 없을 경우에, 즉 위험 부과가 부당할 경우, 그것은 행사할 권력이 도덕적으로 아닌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기 때문에 부당하다. 그러므로 부당한 위험 부과는 위험방지권이 침해되는 개인에 대한 일종의 착취에 있다."고 합니다. 

 

오버딕이 위험방지권 침해가, 자신의 것에 속하지 않는 권위를 타인이 대신 행사하는 것이라는 구조를 갖는다는 지적은 상당히 탁견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결국 위험방지권 침해를 자유권 침해와 같은 구조로 만드는 것이며, 그래서 자유 vs 안전의 문제를 하나의 틀에서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하면서, 그것이 억지로 인위적으로 하나의 틀로 환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와 같은 실질적 동형성을 갖기 때문임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위 논문은 일독할 가치가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