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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학] 실천적 지혜의 효과와 그 한계

by 시민교육 2021. 11. 25.

1. 글의 주된 요지

 

이 글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다른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잘 행위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사항들의 집합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존재케 하는 문제에서 잘 행위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사항들의 집합이 같지 않다는 것을 논하겠다. 

 

2. 실천적 지혜의 정의

 

일반적으로 실천적 지혜는 실천적 여건에서 선택지들을 정확히 파악하여 분별 있게 택하고 택한 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방안을 밝혀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실천적 지혜가 필요한 이유는 분별 없이 선택지를 취하는 어리석음과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삶에서 피할 수 있는 나쁨을 겪기 때문이다. 이 나쁨에는 불필요한 괴로움뿐만 아니라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 그리고 후속의 좋지 못한 결과를 맞는 것이 포함된다.

 

3. 실천적 지혜의 기능: 두 가지 어리석음의 완화

 

어리석음은 두 가지 종류로 대별해볼 수 있고, 실천적 지혜는 이 각각으로 인한 나쁨을 완화해준다.

첫째로, 분별 없이 선택지를 취하는 어리석음은 선택지에 내재하거나 선택지가 수반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어 어떤 주식이 오를 것이라는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서 그 확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그 실패를 감당하지 못할 규모의 자산을 그 주식 구매에 쓰는 사람은, 해당 선택지에 내재한 위험과 그 위험이 현실화될 경우 생길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식의 가격이 예상과 크게 달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그 구매자의 주관적 확신의 정도나 그런 주관적 확신을 초래케 한 특수한 정보적 환경에 무관하게, 늘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식을 거래한다는 행위는, 언제나 그 특정한 거래 행위를 찬성하는 예측이 틀렸을 경우의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본질적으로 수반하며, 여건이 좋지 못하게 전개되었을 때 그런 결과를 감수하게 되는 사태를 예상해보지도 않고 주식을 거래하는 사람은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때그때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어떤 분야의 지식에 정통하거나 기예에 숙달되기를 바란다면, 이는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일상생활을 사는 선택지에 내재하거나 수반되는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도 혼자 살 때는 조율할 필요가 없었던 생활습관을 조율할 필요성이 없으리라 예상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조사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그런 비판이 가해질 경우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 물정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선택지에 수반하거나 내재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 물정에서 자신만은 예외가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전형적이다. 그래서 이 본인만은 예외라는 생각이 어리석음의 근간이며 수많은 다른 어리석음을 파생케 하는 중대한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실천적 지혜는 본인만이 예외라는 생각을 뿌리부터 지워버린다. 그저 객관적인 사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적어도 사회에 일반적으로 활용가능한 정보들은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때 커다란 왜곡 없이 감안할 수 있다. 

둘째로, 어리석음은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를 잘 모르면서도 모든 선택지들을 다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솜씨 좋은 장인은 어떤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또는 어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안다. 그 방법들은 쉽게 생각해낼 수 있거나 매뉴얼에 간략하게 수록될 수 있는 목록에 한정되지 않는다. 누구나 연상을 통해 떠올리거나 매뉴얼에 있어 찾아볼 수 있는 선택지들의 목록이 구상의 실현과 문제 해결에 활용가능한 방법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물의 이치를 따라 조금 더 유연하게 훨씬 폭넓게 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거짓 이분법을 자주 구사하며, 그래서 열등한 선택지 집합 중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해야 한다는 사고에 사로잡힌다. 더 나아가 자신이 떠올린 선택지 중 하나로 이미 마음을 결정한다음, 그 결정을 찬성하는 이유만을 집중 거론할 뿐 그 결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시하거나 사소화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해악을 막고자 할 때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것은 그 해악과 연결될 수 있는 행위들을 사전에 검열하거나 원천봉쇄하는 것 또는 그 해악 발생시에 처벌을 극도로 강화하는 해결책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지지하지 않으면 그것은 해악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라는 거짓 이분법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연관된 행위들을 원천봉쇄함으로써 또는 전면적 감시 하에 둠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무시하거나 사소화한다. 어떤 해악 억지도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한계 내에서 그리고 비례의 원칙을 준수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범위 내에서 여러가지 점진적인 안들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은 도외시된다. 실제로 미국에서 금주법 운동이 실정법화될 때 유력했던 논거는 '그렇다면 당신은 술로 인한 그 모든 문제 발생을 내버려두겠다는 것인가?'였다. 이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세계라면 없을 해악이 0이 되는 수준까지 그 해악을 줄여나가기 위한 자유 제한을 추가로 거듭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균형을 잃은 초점을 가진 목적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이러한 어리석음들을 완화시켜준다. 그리고 이러한 어리석음을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실천적 지혜는 얻기가 만만치 않다. 사실은 상당히 우호적인 여건에 있는 사람들만이 실천적 지혜를 준수한 정도라도 획득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천적 지혜의 조각들만 알고 갈 뿐이다.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실수나 오류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적어도 활용가능한 증거 위에서는 최선의 선택을 택하는 체계적인 추론의 방법을 택하며, 더 나아가 어떤 행위의 실행 이후 반대의 증거가 발견되거나 추론의 오류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전과 같은 증거 상태에 있거나 추론에는 오류가 없다는 식으로 고집하지 않는다. 무엇이 합리적이고 합당한지 평가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관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에 대해 합리적이고 합당한 논박이 있을 경우에 그 논박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부터 어리석을뿐만 아니라 줄곧 어리석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메타인지 능력이 대단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열등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열등한 결정으로 인해 생긴 크나큰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문제가 바로 그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도통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외부의 여건에 잘못을 돌리며, 똑같이 원래의 결정을 고집한다. 추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성공적인 논박이 있어도 그 논박의 타당성을 인정치 못한다. 그들에게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믿음이 그들 자신의 자아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되며, 그래서 그 믿음을 건드리는 것은 그들의 자아를 공격하는 일로 받아들인다. 

 

4. 의지박약과 실천적 지혜 

 

의지박약을 극복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의 문제인가?

이것은 어찌보면 이름을 붙이는 것에 관한 사소한 질문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즉, 소크라테스와 같은 이들은 '정말로 잘 안다면 실천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들은 '잘 안다고 하여도 의지의 박약(akrasia) 때문에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앎(knoweledge)이라는 명칭을 어디까지 붙이느냐의 문제라고 말이다.

이를테면 건강하게 자고 일어나는 생활습관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안다. 건강하려면 하루에 최소 7시간 이상을 자야 한다. 7시간을 확보하려면 자신의 생활 여건 상 잠이 드는 시간은 늦어도 자정을 넘지 않아야 한다. 건강하려면 하루에 9시간 이상을 자서는 안 된다. 9시간 이상 자지 않으려면 자신의 생활 여건상 아침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주 새벽 2-3시에 잠이 들며, 그래서 평일에는 출근하려고 4-5시간 밖에 자지 못하며, 휴일에는 10시간씩 자며, 그래서 일요일에는 또 새벽 2-3시 전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이 사람은 건강하게 자고 일어나는 것에 관한 앎을 갖추었는가? 진정으로 안다면 실천할 것이고, 그래서 이 사람은 온전한 앎을 갖추지 못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알 것은 다 알았지만 단지 의지박약 때문에 실천하고 있지 못하며, 이제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의지박약을 극복하는 굳은 심지이지, 추가로 무엇인가 인식적으로 더 안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표현하면 정말로 이름을 어디에 붙이느냐의 사소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이름 붙이기(naming)의 문제로 사소화할 수 없는 중요한 쟁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는가, 그리고 의미를 파악하면서 익숙하게 들어보았다는 것과 제대로 이해한다의 차이가  있는가의 쟁점이 그것이다. 

먼저 이 사람이 추가로 알아야 할 것이 있는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 사람이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출퇴근하면서 꼭 필요해서 걷는 것 이외의 운동은 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그래서 하루동안 몸을 충분히 격렬하게 움직이는 시간이 없었다. 그럴 경우에 잠을 자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 사람이 모른다고 해보자. 이 사람이 이 사실을 추가로 안다면, 별도로 격렬하게 운동하는 시간을 저녁 7시 정도에 1시간 정도 가져서 몸을 충분히 피로하게 만드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실천에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의미를 파악하면서 익숙하게 들어보았다는 것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있는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 사람이 별도로 격렬하게 운동하는 시간을 내면 잠이 잘 오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어보았다고 해보자. 그리고 왜 그런지 그 원리도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로 별도로 격렬하게 운동을 일주일 정도로 해보고 나면 그 효과를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는 그냥 많이 들어서 익숙한 문장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도 비슷하다. 수학 강사가 칠판에 어떤 문제의 풀이를 전개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고 하여도, 자신이 직접 그 문제를 풀어보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appreciate)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막히게 되는 지점이 수학 강사의 풀이 과정에서는 강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 수학 문제를 자기 힘으로 끝까지 정확하게 풀때까지 연습한 자는, 그 수학 문제의 풀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에, 그저 반복해서 그 과정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정도만 남이 풀이하는 것을 보고 듣기만 한 자는 그저 익숙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수학 문제를 실제로 스스로의 힘으로 풀게 될 때까지 연습하는 과정은 인식적 활동의 측면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격렬하게 1시간 운동을 하고 몸을 어느 정도 노골노골하게 녹초로 만든 상태에서 밤을 맞이하는 경험을 여러번 해본 사람은,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어떤 현상을 체험해본 사람은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안다. 실제로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한 사람은, 그런 그리움을 노래한 수많은 가요와 그런 그리움을 그려낸 수많은 수채화를 감상한 사람이 모르는 어떤 것을 안다. 

추가로 알 것, 즉 '제대로 이해하기'가 실제 체험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현 상태와 실제 실행 상태의 다리(bridge)가 되는 경로에 관한 활용가능한 전략들에 대한 지식들도 추가로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원격대학에 지원하고 등록한다면 여러가지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것임을 안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 사람은 지원하고 등록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매우 간단하다는 것, 그리고 어느 페이지에 들어가서 어떤 버튼을 클릭하고 어떤 서류를 제출하면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면 이 사람이 새로운 것을 원격학습을 통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간 과정에 대한 어찌보면 사소한 앎이 추가되지 않음으로 인해, 실천으로 이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거꾸로 그 사소한 앎의 추가는, 상대적으로 쉽게 실제 지원하고 등록하는 과정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복지혜택을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막연히 그런 신청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지만, 그 신청에 작성하는 서류가 무엇이고 어디가면 서류 작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해서 서류 작성의 어려움 때문에 혜택을 받는 공적 신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에서도 실제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태이다. 

중간다리가 되는 전략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으로 명백하지 않고, 어느 정도 고심해서 생각해봐야 하거나 자신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잠이 들기 적어도 30분 전에는 스마트폰을 하지 않는 것이 잠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침상에서 스마트폰을 하게 되면 계속 새로운 것을 보려고 하다가 결국 잠이 늦게 되는 경험도 여러번 해보았다. 그래서 '30분 전에는 스마트폰을 하지 않아야 잠이 잘 든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앎이 설정한 지침, 즉 '스마트폰 보지 않기'라는 지침을 따르는 상태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다리가 되는 전략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밤이 다 되어 다른 별도의 급한 일이 없는 상태에서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행위이며, 그래서 '잠이 들기 전에 스마트폰을 보지 않아야 하지만 스마트폰을 본다'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모든 습관에 있어서는 대체행동의 개발이 중요하며, 무엇이 잘 작동하는 대체행동인가는 사람의 기질과 여건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배우고, 또 그런 대체행동을 고심하여 생각해본다면, 추가적인 앎을 갖추게 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스스로를 관찰해보니,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이 심심하다는 것이 충동의 원인이 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그래서 그 심심한 짧은 시간(10분 정도의 시간)을  현실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즐거운 공상을 하는 시간으로 채우기로 한다. 그렇게 해보니 자신에게는 잘 맞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중간다리 전략을 알게 된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목표하는 실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박약을 극복하는 것이 적어도 상당 부분은 실천적 지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의지박약의 극복은 중요한 지침을 알기, 체험하기를 포함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그리고 세부적인 중간다리 전략을 알기를 포함한다. 

물론 실제 실천으로 향하는 모든 동인을 인식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특히 그 어떤 중간전략을 쓰더라도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이나 충동 극복하기는 의지적인 부분이 분명히 작동한다. 그 의지적인 부분은 어떤 인식적인 작업으로 해소할 수 없는 것 같다. 그 부분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상을 유지하고 그 정체성에 따라 어떤 괴로움은 당연히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 작용이다. 그러나 실천적 지혜의 활용은 그 의지 작용에 소모되는 의지력을 시도때도 없이 작동시키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실천적 지혜는 많은 중간다리가 되는 전략들의 연쇄로 행동의 순서와 여건을 구성함으로써 순수 의지가 작동하는 부분을 적정한 정도로 줄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의지박약의 극복은 뭉떵그려 모두 실천적 지혜의 문제라고 할 수도 없고 모조리 순수 의지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어쩄거나 상당 부분은 실천적 지혜의 문제이다.  

 

4. 인간 삶의 괴로움에서 어리석음이 차지하는 위치

 

어리석음이 인간 삶의 괴로움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초래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어떠한 답도 명확하지 못한 용어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 사실 질문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인간 삶의 괴로움의 많은 부분이 비록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여도 그 전부가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삶의 괴로움의 많은 부분이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임은 잘 알 수 있다. 사적인 일에서나 공적인 일에서나 그렇다. 평소에 꾸준히 운동했더라면 좀 더 체력이 튼튼해서 더 활기차고 정력적으로 살 수 있을텐데,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하루 30분 운동할 시간을 일하는데 쓰겠다고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장기적으로 일을 덜 잘 해낼 것인데다 일상도 그만큼 덜 활기차고 상대적으로 더 무기력하게 되는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억압적 체제는 많은 부분 인간 어리석음에서 초래된다. 억압적인 체제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보다 자유로운 체제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그 자유가 더 침해되어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주 많이 거론할 수 있고, 아마도 체계적 유형 구분도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삶의 괴로움의 많은 부분이 어리석음이 원인이 된 것이다'라고 하는 말은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괴로움은 모두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라는 1인칭 원인 한정 진술은 당연히 거짓이고, 어리석음의 보유자인 인간을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한 3인칭 관찰적 진술인 '인간의 어리석음이 모든 인간 괴로움의 원인이다'라는 말조차도 명백히 거짓이다. 

먼저 인간의 괴로움은 모두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는 언명을 살펴보자. 이 언명은 1인칭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담론에서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다. 자기 삶의 괴로움은 전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언명은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다른 표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언명은, 깨달음을 주기 위한 극적 장치로 전칭양화사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칭진술은 단 하나의 반례로도 거짓이 입증된다. 자신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지 않은 괴로움이 적어도 하나가 명백히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재해나 인간 육체의 취약성으로 인해 발생한 강렬한 육체적 고통이다. 어떤 사람이 기상청도 예측하지 못한 토네이도에 휩쓸려 하늘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졌는데, 반신불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경에도 문제가 생겨 24시간 계속해서 강렬한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되었다. 또는 나이가 들어 자연히 발생하게 되는 어떤 불치의 질병이 발생하였다면 그 질병이 초래하는 고통 중 일부는 주의를 다른데 돌리거나 달리 맥락화하거나 약물을 사용함으로써 줄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이 모든 인간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관찰적 언명도 타당하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지혜롭고 정의롭게 살아도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고 불의하다면, 그 사람의 삶에 많은 해악이 자기 책임에 의하지 않고 초래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나 질병과 자연재해, 그리고 합당한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의사소통이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어리석고 불의한 인간들은 일종의 위험한 동물의 편재와 같이 자연적인 사태로도 이해할 수 있다. 

 

5. 잘 사는 삶과 좋은 삶의 구분, 실천적 지혜의 이론적 한계와 실제적 한계

그러므로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으며, 실천적 지혜를 실천한다 해서 그 삶이 좋은 삶이 되리라는 보증은 없다. 실천적 지혜를 실천하는 삶은 어떤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잘 사는 삶(a life lived well)이 될 수는 있어도 좋은 삶(good life)은 아닐 수도 있다. 좋은 삶은 그 삶의 주체(A)가 아닌 사람(B)이 자신의 삶에는 없는 속성이지만 그 삶에는 있는 속성 때문에 바로 그러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삶이다. 불의한 체제에 용기 있게 저항하다가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고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삶은 자기 삶의 도전에 잘 응전한 삶일 수는 있으나, 선망되는 삶일 수는 없다. 

실천적 지혜는 원칙적으로 1인칭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갖출 수 있는 범위는 합리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범위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실천적 지혜는 많은 괴로움을 완화할 수는 있지만 그 지혜를 오롯이 갖춘다 할지라도 없앨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괴로움들이 삶에는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실천적 지혜는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그 많은 것은 여전히 대단히 작은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이론적인 차원에서도 이미 그 한계가 뚜렷하다. 

이에 더해 실천적 지혜의 실제적 한계도 있다. 이는 실천적 지혜는 얻기가 매우 까다로우며 또한 남겨지는 의지의 부분이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점을 말한다. 실천적 지혜는 관련된 이론이성을 올바르게 행사할 것을 요한다. 현대 사회의 실천이 자기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 인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많은 의사결정과 행위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론이성을 갖추어야 하는 영역은 대단히 광범위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리에 의탁하여 자신의 사고를 외주화하는 쪽을 택하기 쉬우므로, 삶에서 필요한 이론이성조차라도 제대로 갖추는 사람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만 영향을 주로 미치는 영역으로 한정해보아도, 의지박약을 극복하기 위한 주요 지침과 추가적인 지침, 실제의 체험, 중간다리가 되는 전략에 대한 앎을 포함하는 이상, 실천적 지혜를 사소한 것에 대해서라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만일 실천적 지혜가 얻기 그토록 쉬운 것이라면 세상은 탁월한 삶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의지의 부분은 여전히 남는다.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조금도 괴롭지 않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장인 것 같다. 이미 습관화된 영역에서는 의지를 발휘할 필요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괴롭지 않다. 그러나 습관으로 안착되지 않은 영역들은 차고 넘친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는 중간다리가 되는 전략을 활용한다고 해도 의지가 발휘될 부분이 무수히 숨겨져 있다. 게다가 한 번 그런 실천을 달성했다 할지라도, 삶의 여건이 달라짐에 따라 그 실천적 지혜의 실행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섭생과 운동의 이상에 상당한 정도로 가까이 갔던 사람도 책임과 역할이 더 늘어난 중년이 되면 거기에 집중할 여력은 상당 부분 사라지기도 한다.

 

6. 이미 존재하는 삶의 운영과 없던 존재의 개시의 구별

 

따라서 어떤 존재를 새로이 시작하게 하면서, 그 존재가 실천적 지혜를 무난히 획득하여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삼중의 오류를 범한다. 그런 기대는 첫째로 실천적 지혜의 획득이 무난할 것이라는 오류를 범하고, 둘째로 실천적 지혜를 획득하면 잘 사는 것을 넘어서 좋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보증한다는 오류를 범하고, 셋째로, 실천적 지혜를 갖춘 상태에서는 괴로움이 별로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오류를 범한다. 

삼중의 오류는, 영원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크게 낮춘 기준으로 살펴보아도, 없던 존재를 개시한다는 결정이 절대적으로 보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상당한 보증조차도 할 수 없는 보증을 하는 것을 전제함을 드러낸다. 즉 삼중의 기대가 모두 실현되리라는 보증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평생 동안 커다란 어리석음 속에서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에 해를 무수히 끼치며, 어느 정도 실천적 지혜를 갖췄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크고 작게 있는 비우호적인 여건 때문에 응당하지 않은 괴로움을 겪으며, 또한 의지의 발휘를 위해 늘 크고 작은 부담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간 삶에 대한 관찰과 통찰은 실천적 지혜의 일부를 구성함이 분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