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스티븐 드 위츠가 악에 대한 슈타이너 견해를 비판하면서, 이와 함께 슈타이너의 방법론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어떤 종교관을 전제로 한 악이 아니라, 세속적 의미에서의 악, 즉 세속의 도덕에 의해서 특별히 심대한 잘못으로 평가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먼저 저자는 슈타이너의 뒤틀린 쾌락 해명을 설명합니다. 그 해명에 따르면
‘어떤 행위는 (a) 그것이 그르고 (b) 그 행위자가 그 행위를 쾌락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무심하게 수행할 때 악하다.’(Steiner: 2002: 192 fn.10.)
슈타이너는 이것이 세속적 악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봅니다.
슈타이너는 어떻게 이러한 정의를 도출하였을까요? 두 단계의 작업을 통해 도출하였습니다.
첫째, 악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개념에 결부된 네 가지 필수적 속성을 끌어냅니다.
악의 세속적 개념은 반드시:
1. ‘부정적인 도덕적 평가의 다른 용어와 동의어가’ 아니어야 한다.
2. ‘행위의 악함과 그 가해자 또는 가해자의 성질 또는 가해의 결과로 생기는 사태의 악함과의 여하한 연관관계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지지하게끔 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위에’ 적용되어야 한다.
3. ‘심하게 하거나 질적인 뜻에서 잘못을 가중시키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4. ‘양적인 편차’를 인정해야 한다. 즉 (원칙적으로) 악한 행위는 ‘덜한 악’을 의미 있게 지칭할 수 있도록 측정될 수 있어야만 한다.(Steiner 2002, 184-85. )
둘째, 슈타이너는 1-4를 전제로 악한 행위를 의무를 넘어선 행위와 비교하고 대조합니다. 의무를 넘어선 행위는, 그런 행위를 영웅적이고 통상적인 윤리적 책무를 넘어선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악도 통상적인 윤리적 책무 위반과 다르지 않을까라는 발상을 밀고 갑니다. 그래서 의무를 넘어선 행위와 대칭적인 짝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검토합니다. 그러나 허용과 의무라는 규범 양상 면에서는 대칭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의무를 넘어선 행위는 (의무인 행위처럼) 해야 되는 것이 아니지만, 악한 행위는 (보통의 그릇된 잘못과 마찬가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악한 행위와 의무를 넘어선 행위의 감정적 속성에 있는 부정적 대칭성은 존재한다고 봅니다. 의무를 넘어선 행위가 수행하기 고통스럽고 많은 자기희생을 요하는 반면, 사악한 행위는 쾌락적이며 자기탐닉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적 해석은 네 가지 필수 요건을 충족한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의 비판 요지는, 슈타니어의 뒤틀린 쾌락 해명은 과소포함과 과대포함 문제(범위 문제)를 심각하게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대포함의 예(E1)는 쾌락을 느끼면서 대형 소매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청년의 예입니다. 이런 청년의 행위는 통상적인 잘못에 속하지 그와는 질적으로 다른 악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슈타이너의 해명은 이 청년의 행위를 악한 행위로 분류합니다.
과소포함의 예(E2)는 혐오감과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인체실험을 하는 나치 과학자의 예 또는 유대인 랍비에게 어마어마한 굴욕을 주는 나치 장교의 예입니다. 이런 과학자와 경찰의 행위는 분명 악한 행위로 분류되어야 할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슈타이너의 해명은 이러한 행위가 쾌락이나 무관심의 감정적 요소가 없다는 이유로, 악한 행위가 아니라고 분류하게 됩니다.
저자는 슈타이너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방안들을 검토하지만, 이 방안들은 악의 해명을 내용 없게 만들거나(예를 들어 특정하지도 못하는 문턱을 넘는 규모의 문제로 만들거나), 감정적 요건을 사실상 빼버리게 만들므로, 슈타이너가 밀고 나갈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대신에 저자는 악의 문제를 반성적 평형의 방법에 의해 탐구하고자 합니다. 그는 "정의관은 원리에 관한 자명한 전제 또는 조건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대신에 정의관의 정당화는 많은 고려사항들이 서로 지지되어 하나의 정합적인 견해로 모든 것이 함께 들어맞는가의 문제이다."(Rawls 1971, 21)라는 롤즈의 지침을 인용하며, 이것을 악의 관념을 도출하는 데도 똑같이 적용합니다.
그 결과 제시하는 저자의 악에 대한 해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악한 행위, 기획 또는 사태는 언제나 부당한 행위, 기획, 사태이지만 다음과 같은 조건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A 보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비인간화(기본적 존중과 존엄을 부인)할 의도로 인신을 고의적으로 침해한다.
B 행위나 기획이 유관한 도덕적 지위를 지닌 유정적 존재에게 하나 이상의 ‘거대한 해악’을 쓸데없이 가하거나 발생시킬 것이다.
C 행위나 기획이 (또는 공언된 도덕이) ‘도덕적 풍경’을 절멸시키고자 한다.
그러면서 슈타이너의 뒤틀린 쾌락 해명의 심각한 결함이 슈타이너의 정초주의적 방법론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정초주의적 방법론은 최소한의 규범적 투입 위에서 작동하는 논리와 형식적 고려사항에 협소하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도덕적 쟁점들에 관한 우리의 강력하고 소중히 여겨지는 직관적 판단과 공명하는 도덕 원리들을 찾는 데 장애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현실은 복잡하고 어려우며 흔히 깔끔하지 않고 그 결과. 도덕적 경험을 선형적 설명으로 압축하려고 하는 협소한 초점을 지닌 환원주의적 원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비환원적 선언적('or'의 의미) 접근은 의도적으로 도덕적 복잡성을 수용하고자 하며, 그래서 비록 그것이 뒤틀린 해명보다는 깔끔함이 부족하지만 우리의 직관에 비추어 심사할 때 더 나은 결과를 보인다고 합니다.
악에 대하여 저자가 제시한 해명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슈타이너의 견해는 결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슈타이너가 개념 분석을 지반 작업으로 한 것이 그 결함의 원인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악에 대한 해명을 소재로 하여, 슈타이너의 방법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으로 나아가는 고리는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악에 대한 해명은 슈타이너가 제시한 네 가지 필수적 속성 중 네 번째 속성, 즉 양적인 평가를 가능케 해야 한다는 속성만 갖추지 못했을 뿐, 나머지 세 가지 속성은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속성은 실제로 악 개념의 본질로 일상용어에 포함된 것인지가 의심스럽니다. 사람들은 항상 양적 규모를 염두에 두면서 양적 평가가 가능할 것을 이야기하면서 악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적으로 통상의 그릇된 행위와 구별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속적 악 개념이 특별한 실천적 대응을 촉발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그 특별한 실천적 대응으로 처리해야 할 어떤 질적 속성을 갖추고 있다면 족하지 항상 양적 평가가 더 나아가 가능해야만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슈타이너가 말한 1, 2, 3의 요건은 필요하고, 4의 요건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타당한 개념 분석의 결론이겠습니다.
그리고 슈타이너가 잘못 길을 들어선 원인은 개념의 필수적 속성을 뽑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규범 양상의 대칭성이 성립되지 않는 '의무를 넘어선 행위'와 어떤 대칭적 요소를 굳이 찾아 그것을 '악'의 요소로 삼으려고 하는, 유비의 충동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규범 양상의 대칭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비는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냈어야 합니다. 구조적 동형성이 성립하지 않는 대상들 간에, 유사점을 찾아 외삽하는 것은 그저 연상작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슈타이너의 견해의 결함의 원인은 개념분석에 속하지 않는 것, 흔히 사람들이 범하는 자유연상 작용에 있는 것이지, 개념분석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슈타이너의 방법론이, 개념으로부터 다툼이 많은 규범적 결론을 얻어내려고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면 그 방법론은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자가 말했듯이, 논리적 정합성을 찾아 나섰지만 이것은 이론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고, 논리적 정합성 심사는 둘 이상의 이론이 통과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념 분석을 규범적 탐구 작업의 전제로 삼는 것은 그렇게 틀린 태도는 아닙니다. 다만 개념 분석의 자리를 정확하게 찾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추가로 한 가지 일러두자면, 저자가 제시한 악의 충분조건 세 가지 중에서, 실제로 아주 특별한 대응을 필요로 하는 것은 세 번째의 것(C)입니다. 왜냐하면 A(무력한 사람에 대한 비인간화), B(거대한 규모의 해악을 쓸데없이 가하는 것)은 정상적인 도덕적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도덕적 풍경을 절멸시키는) C의 배경이 아니고서는, 매우 곧바로 인식되고 또 대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적인 배경과 중립적인 사건에 있어서 A, B 행위 자체를 긍정하거나 그 피해자에 대한 구제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보기 드뭅니다. 언제나 C의 배경이 있기 때문에 A와 같은 일도 필요한 일(또는 실제로는 무력하지 않고 위험성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가해지는 일)로 여겨지고, 또 B와 같은 일도 쓸데없이 가하는 해악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꼭 필요한 조치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C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어떤 이데올로기일까요? 그것은 의무론을 부인하는 목적론이며, 또한 통상적인 권리와 의무를 담론을 기이하게 바꾸어 놓는 풍부한 수사적 장치를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그런 이데올로기에서는 비인간화와 가해가 해방이자 정의로운 일로, 쓸데없는 것이 공익을 위해 긴절한 일로 이야기될 것이며, 권리는 그 이데올로기의 궁극적 목적에 따라 주형되는 내용으로 축소되어 이야기될 것입니다.
악은 통상의 부당한 행위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악의 원인이 되는 이데올로기는 매우 익숙하고 널리 퍼져 있는 씨앗에서 비롯됩니다. 일반적으로 엄밀하고 치열한 의무론적 추론 없이 전개되는 규범적 주장들은 이 씨앗들을 실제로 공유하거나, 그렇지 않아도 취약하게 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악의 평범성을 초래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