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문의 내용 소개
크레이머(Matthew Kramer)는 이 논문에서 ‘법치(rule of law)’의 본질적 성격을 둘러싼 논쟁, 특히 풀러(Lon Fuller)의 ‘합법성 원칙(eight principles of legality)’을 ‘법의 내적 도덕성(inner morality of law)’으로 규정하는 해석에 도전한다. 그는 법치를 단순히 “법체계가 존재하고 기능하는 상태”로 정의하면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권력자들에게도 사익적·도구적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우선 그는 조건부 질문을 제기한다. 만약 어떤 도덕적으로 극악한 체제의 권력자들이 오직 권력 강화와 시민 착취라는 순전히 사익적 동기만을 가진다면, 그들에게도 법치 준수는 합리적 이유를 제공하는가? 크레이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질문은 경험적 사실, 즉 실제 권력자들의 심리적 동기 유형을 묻는 것이 아니라, 행위 이유(reasons-for-action) 차원의 문제이다. 행위 이유에는 실제로 동기를 유발하는 요소뿐 아니라, 목표 달성에 유용하다면 합리적 행위자가 인식했을 법한 이유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권력자들이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법치가 제공하는 도구적 이유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법치의 도구적 장점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시민들에게 분명한 행동 지침을 제시한다. 둘째, 불복종자는 처벌하고 복종자는 처벌하지 않는 구조를 통해 복종 인센티브를 창출한다. 셋째, 권력 내부의 관료들 간 상호 조정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장기간·대규모의 지배가 지속되도록 한다. 이로써 권력자들이 지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법치 원칙을 일정 정도 준수할 강력한 사익적 이유를 갖게 된다.
이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론은 대체로 “억압적 권력자들은 실제로는 인종적 순수성이나 종교적 열정 같은 비사익적 동기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법치 준수는 본질적으로 도덕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크레이머는 이러한 반론이 행위 이유와 실제 동기를 혼동한다고 지적한다. 실제 동기가 언제나 비사익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가능하더라도, 그 자체가 법치가 내재적으로 도덕적이라는 결론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크레이머는 유비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예컨대, 총을 쏘아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나 도박 행위는 실제로는 비사익적 동기에 의해 발생할 수 있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철저히 사익적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동기화될 수 있다. 따라서 실제 동기가 언제나 비사익적이라고 해서, 그 행위 자체가 내재적으로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러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모든 행위가 ‘내재적으로 도덕적’이라고 분류되는 결과에 이르며, 그 개념 자체가 공허해진다. 법치 준수 역시 마찬가지로, 실제 동기가 어떠하든 간에 사익적·도구적 이유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으므로, 그것을 내재적 도덕성의 증거로 볼 수 없다.
시먼즈(Nigel Simmonds)는 이에 대해 여러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예컨대 탈레반식 종교 근본주의 정권 같은 사례를 들어, 순수한 테러 체제에서도 법치 준수가 통치자들에게 특별한 이익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임의적·무차별적 폭력이 억제 수단으로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복종 여부와 상관없이 무작위적 처벌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을 상정하며, 법치 준수가 복종 인센티브를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크레이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는 무엇보다 복종 인센티브의 핵심은 ‘복종과 불복종 사이의 처벌 확률 격차’임을 강조한다. 복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당할 확률이 높아지면, 불복종과의 격차가 줄어들고, 준수 인센티브는 약화된다. 따라서 무작위 처벌이 빈번한 상황에서는 법치의 인센티브 촉진 효과가 약화되지만, 이것이 곧 법치의 효용을 부정하는 근거는 아니다. 오히려 이는 법치의 효과가 왜 중요한지를 반증한다.
또한 시먼즈의 두 번째 시나리오 ― 규범에 명시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자의적 폭력이 가해지는 경우 ― 역시 법치의 틀을 벗어난 상황일 뿐, 법치의 효과를 무력화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설령 억압적 체제의 권력자들이 종교적 열정 같은 비사익적 동기로 권력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법치를 유지하는 이유는 여전히 도구적 효용에서 비롯될 수 있다. 권력자들은 법치를 목표 자체로가 아니라 목표 달성의 수단으로 채택할 수 있으며, 이 점은 사익적 권력자나 비사익적 권력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성립한다.
마지막으로, 시먼즈는 ‘뉴 모니아(New Monia)’라는 가상의 사회를 제시하며, 법치와 비교할 때 법치가 개인 자유를 보장하는 도덕적 덕목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크레이머는 이 대조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법체계는 때로 과도하게 규제하여 개인의 특이성을 억압할 수 있으며, 특히 억압적 법체계에서는 뉴 모니아보다 개인 자유를 더 제약할 수 있다. 따라서 뉴 모니아와 법치의 대비가 곧바로 법치의 도덕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크레이머의 핵심 논지는, 법치 원칙 준수가 내재적으로 도덕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법치의 준수는 권력 유지, 지배 안정, 시민 착취라는 사익적·도구적 이유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으며, 실제 동기가 언제나 비사익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법치의 도덕성을 입증하지 못한다. 시먼즈의 다양한 반론들 ― 순수한 테러 체제, 무작위 처벌 시나리오, 뉴 모니아와의 비교 ― 는 모두 크레이머의 논지에 결정적 반박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풀러의 합법성 원칙을 “법의 내적 도덕성”으로 부르는 것은 여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이 크레이머의 결론이다.
2. 논쟁의 사상사적 위치
여기서 크레이머–시먼즈 논쟁의 사상사적 위치를 잠시 살펴보자. 이 논문은 20세기 후반 이후 법실증주의와 비실증주의 사이에서 벌어진 법치 개념의 성격 논쟁 속에 자리 잡는다.
풀러(Lon Fuller)는 『법의 도덕성(The Morality of Law, 1964)』에서 법체계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합법성 원칙(8가지)을 제시하고, 이를 “법의 내적 도덕성(inner morality of law)”이라 불렀다. 그는 이러한 원칙들이 단순한 기능적 조건이 아니라 법질서가 도덕적 정당성을 지니는 데 기여하는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하트(H.L.A. Hart)는 풀러와 논쟁하면서 이 원칙들을 “기능적·기술적 요건”으로 보았다. 즉, 법체계가 법으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지, 그것이 도덕적 이상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는 법과 도덕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분리 논제(separability thesis)”의 대표적 옹호자였다.
크레이머(Matthew Kramer)는 하트 이후의 ‘신(新)실증주의’ 진영에 서 있는 학자로서 풀러의 합법성 원칙을 다시 검토하면서, 이 원칙들은 “법치(rule of law)”의 조건일 뿐 본질적으로 도덕적이지 않다고 논한다. 그는 억압적 체제에서도 권력자들이 권력 유지와 시민 통제를 위해 도구적으로 법치를 준수할 강력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풀러식 해석(내적 도덕성)을 반박한다.
시먼즈(Nigel Simmonds)는 케임브리지 학파를 대표하는 법철학자로서 『Law as a Moral Idea』, 『Central Issues in Jurisprudence』 등에서 풀러의 입장을 옹호하며, 법의 개념 속에 도덕적 이상이 내재한다는 점을 변론한다. 크레이머와의 논쟁은 풀러–하트 논쟁을 계승하면서도, 법치의 내재적 도덕성을 둘러싼 현대판 쟁점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이 논문은 하트–풀러 논쟁의 2세대 논전으로서, 법실증주의와 비실증주의가 “법치의 도덕성”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충돌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즉, 독자는 이 논문을 읽으면서, 하트 대 풀러의 전통적 논쟁이 21세기 초 영국 법철학에서 크레이머 대 시먼즈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크레이머는 하트적 계보에서 실증주의적 구분을 고수하는 반면, 시먼즈는 풀러를 계승해 법 개념에 도덕적 이상이 내재한다는 점을 옹호한다.
요약번역자가 평가하기에는, 적어도 크레이머 대 시먼즈의 논쟁에서는 크레이머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풀러의 합법성 원칙은 사악한 법체계에서도 유용하게 준수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풀러의 합법성 원칙은 유익하고 정의로운 법체계에서는 그 유익하고 정의로움의 구성적 일부분이 되며, 결과적으로도 유익성과 정의로움을 일반적으로 증진시킬 것이다. 따라서 풀러의 합법성 원칙은 유익하고 정의로운 법체계에서는 정치도덕적 원칙의 일부를 이루지만, 그렇지 않은 법체계에서 그 자체만으로 본래적 또는 본유적으로 정치도덕적 원칙이라고 할 수는 없다.
2. 형식적 법치(rule of law) 대 실질적 법치(Rule of Law), 그리고 본 논문의 논지와 실질적 법치와의 양립 가능성
크레이머의 논문은 “법치(rule of law)”를 법체계가 법으로 기능하기 위한 기술적·구조적 요건으로 파악한다. 즉, 법적 규범이 존재하고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조건일 뿐, 그 자체가 도덕적 이상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그는 ‘법치 = 도덕적 가치’라는 규정에 반대한다.
반면, 정치철학적 논의에서 흔히 말하는 “법의 지배(Rule of Law, 대문자)”는 정치도덕적 이상으로서의 법치이다. 즉, 단순히 법체계가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법체계가 시민들에게 준수 의무를 부과할 수 있으려면, 그 체계는 정의·평등·자유 같은 정치도덕적 가치와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는 법 해석 과정에서 그러한 가치와의 일치를 보장하는 제도적·해석론적 기제가 필요하다.
크레이머의 주장은 개념 분석 차원에 있다. 즉, 법체계가 법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풀러의 원칙들이며, 이 원칙들이 충족되면 법치(rule of law)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 상태만으로 도덕적 정당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반대로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옹호하는 정치철학적 주장은 규범적 차원에 있다. 법체계가 시민에게 정치도덕적 준수 의무를 부과하려면, 법치(rule of law)를 넘어 Rule of Law와 일치해야 한다.
크레이머는 법치(rule of law)는 법체계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최소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도덕적 정당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 분석 차원에서의 논지는, 정치철학적 입장으로서 법의 지배(Rule of Law)는 시민에게 준수 의무를 발생시키려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이상이라고 보는 논지와 양립가능하다. 즉, 크레이머의 논문은 “형식적 법치 =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실질적 법치(Rule of Law)의 일부라는 동일시를 부정하면서도, 실질적 법치(Rule of Law)를 정치도덕적 이상으로 이해하고, 준수 의무 발생을 위해 그에 합치하는 체계적 기제가 필요하다는 관점과 양립할 수 있다. 크레이머의 논지는 법치(rule of law)가 도덕적 이상은 아니다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지, 법의 지배(Rule of Law)라는 이상을 무가치하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