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하게 말하기와 생산적 대화
누군가 격식 없는 대화 중에 ‘돈이 최고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추상적인 공방이 몇 번 오간다. 그러나 이러한 공방들은 어떤 실질적인 성과도 낳지 않고 끝난다.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돈이 최고다’라는 진술을 그대로 고수하고 다른 사람은 그 진술이 거짓이라는 원래의 믿음을 고수한다. 대화 전체가 비생산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왜 비생산적으로 되었을까? 삶의 지혜에 관한 어떤 단언(assertion)을 하는 사람은 그것이 어떤 실천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그 단언 안에 포함된 개념들을 충분히 명료하게 정식화해야 한다. 또한 삶의 지혜에 대한 단언을 듣는 사람도, 곧바로 논박에 나서기보다는, 명료화가 끝나고 나서 명료화된 단언을 검토하고 자기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돈이 최고다’라는 진술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애매모호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진술에 관하여 생산적인 대화를 하려면 그 진술의 애매모호함을 가능한 한에서 그리고 필요한 만큼은 해소해야 한다. 이 해소는, 그 진술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여러 가지로 상정해보고, 대화의 맥락에서 추출할 수 있는 목적인, 실천적 지침과 직결되는 의미를 가려내는 작업을 통해 도달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그 진술은 돈이 최우선적 가치를 갖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너무나 명백하게 거짓이어서 논의의 가치가 없다. 돈은 본유적 가치가 아니라 수단적 가치이다. 따라서 돈이 본유적 가치에 기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최우선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강도가 돈이냐 목숨이냐 선택하라고 했을 때 돈을 선택하는 사람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또한 돈을 써서 수술을 하면 건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 수술을 하지 않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그런데 ‘돈은 최고다’라는 진술은 이런 의미로 읽힐 수 있게 과장되어 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는 명백한 거짓인 명제를 표현한다는 점은, 이 진술을 하는 사람이 일정정도 대화의 예의 규칙을 지키고 있지 않고 과장된 강조를 위하여 정확성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자신의 논지의 강조를 위하여 정확성을 크게 희생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자원의 낭비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비생산적인 대화의 책임은 우선은 그 진술을 꺼낸 사람에게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대화에서 자비의 원리를 사용하여 생산적으로 논지를 정식화하게끔 도와주지 않은 청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이 말이 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형성하게 된, 곧바로 부정해버릴 수 있는 뻔한 거짓 이외의 어떤 판단을 표현한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 진술을 입에 올린 사람이 강도에게 돈을 주지 않고 죽임을 당하겠다는 결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은 자비의 원리를 지나치게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을 뻔한 참을 진술하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 이에 관한 논의를 간단히 치워버리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생산적이다. 그 뻔한 참이란, ‘다른 사정이 완전히 같다면 돈은 많을수록 좋다’라는 것이다. 돈은 전목적적 수단(all-purpose-means)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인생의 어떤 중심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돈은 소용이 된다. 예를 들어 종교적인 목적이나 타인을 돕고자 하는 이타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돈은 크게 도움이 된다. 그것을 선교나 구호 활동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정이 같지 않다면 돈이 많을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나빠진다면, 돈을 관리해야 할 책임이 계속 부여된다면, 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크게 변한다면 더 이상 그것은 뻔한 참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가치 평가가 개입되는 문제가 된다. 그래서 ‘다른 사정이 완전히 같다면’이라는 조건을 부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뻔한 명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어서, 특별히 자신의 통찰을 드러내기 위해 ‘돈이 최고다’라는 과장된 형식을 취해 표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백히 거짓도 아니며 뻔한 참도 아닌 내용을 가진 것으로 그 진술로 표현되는 태도는, ‘돈은 세간에서 보통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며, 그래서 돈과 그 이외의 것 사이의 선택이 문제되는 경우 중 많은 경우 세간에서 보통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돈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바로 이것이 실천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형태로 돈의 가치에 관한 문제를 진술한 것이다. 말을 꺼낸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생각을 적어도 이런 형태 안에서 진술했어야 하며, 말을 듣는 사람도 바로 이 형태로 그 진술을 받아들였어야 한다. 특히 후단 부분이 실천적 지침과 직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형태의 진술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실질적인 것은 이야기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형태 ‘안에서’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의 키는 몇 센티미터이다’와 ‘영철의 키는 178센티미터이다’는 다르다. 어떤 형태 안에서 실질적인 것을 이야기한 것과 실질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다르다.) 왜냐하면 세간에서 이야기되는 것과 차이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이야기해야 비로소 내용적으로 자기 생각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을 추구하는 것을 우선시할 수 있는 선택 상황의 명세가 제시되어야 하며, 이것이 행위자의 주관적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합리성의 문제로서 일반적 지침을 제시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어야 한다.
일반적 지침을 제시할 수 있는 선택 상황의 명세는 세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유형의 선택 상황은, 돈의 추구가 규범 위반이 되는 경우이다. (여기서의 규범은 정당한 규범을 말한다. 즉 외관만 정당한 것처럼 주어진 규범이 아니라 실제로 정당한 규범을 말한다.) 이 상황에서는 규범을 위반하면서 돈을 더 가질 것인가 아니면 규범을 준수하면서 돈을 덜 가질 것인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특히 엄격한 도덕의 영역, 즉 권리의 침해나 의무의 위반을 포함하는 경우에 선택지들은 예리하게 대립한다. 잡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절도, 횡령, 사기 등을 통해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법 위반이 되지는 않더라도 도덕적 권리 침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상 관련된 정보를 오도하여 계약을 체결케 하였지만 법원 판례에 의해 민사적 불법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수단이 사용된 경우, 법적 권리는 침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권리 침해에는 해당한다.
‘돈이 최고다’라는 진술이 이런 상황에서 돈을 우선하라는 일반적 지침을 의미한다고 해보자. 이 일반적 지침은 틀렸다. 왜냐하면 권리의 존중과 의무의 이행은 특별한 우선성을 가지는 것이며, 이 우선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돈을 더 많이 얻는다는 자신의 목적에 함부로 종속되어 자의적으로 처분되어도 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일반적으로, 규범 위반을 해도 좋은 가치 추구란 없다. 즉 ‘x가 최고다’라는 것이 ‘규범 위반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x를 추구해도 좋다’라는 뜻이라면 x에 어떤 가치가 들어가더라도 그 진술은 틀렸다. x에 설사 더 고상한 것, 예를 들어 예술, 진리, 종교적 신성성이 들어가도 틀렸다. 방화 후의 흥분 상태에서만 걸작인 소나타를 작곡할 수 있는 음악가는 방화를 해서는 안 된다. 개인정보보호법을 어겨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를 학자는 연구해서는 안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어 자신이 믿는 종교의 상징물을 건립하는 정책에 찬성해서는 안 된다. 예술, 진리, 종교적 신성성과 같은 가치조차 우선성을 가질 수 없는 자리에 돈과 같은 수단적 가치가 우선성을 가질 수는 없다. 물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구가 강하고 그 욕구를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충족시키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은 이런 특수한 의미에서의 ‘돈이 최고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원칙에 따라 자기 행위를 지도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원칙, 부당한 원칙에 따라 자기 행위를 지도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상해하여 느끼는 쾌락이 워낙 강하고 처벌될 위험만 없다면 다른 사람을 자신이 상해하는 것을 찬성하는 원칙에 따라 행위하고자 하는 사람의 결의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전혀 이성적 검토를 거치지 않은 한낱 욕구에 의해 추동된 결의다.
결국, 규범을 위반할 것인가 돈을 더 가질 것인가 선택하는 상황에서 돈을 우선하여 선택하는 일반적 지침에 찬동하는 이는, 이성적 존재자로서 규범의 세계에서 자신이 지는 의무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 세계에서 스스로 선언한 아웃사이더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돈이 최고다’라는 불명확한 진술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한 진술의 불명확함으로 인해, 이런 상황에서도 돈을 우선하는 선택을 할 사람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물론 정교화의 요구를 받았을 때, 이런 상황에서 도덕적 권리 침해를 기꺼이 하고 돈을 택하겠다고 답할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시적으로 그 점을 드러내는 것이 수반하는 위험 때문에 정확한 표명을 삼갔을 수도 있다. 따라서 ‘돈이 최고다’라고 기세 좋게 이야기한 사람은 높은 가능성은 아닐지라도, 그런 말을 기세 좋게 하고 다니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을 스스로 초청한 사람이다. 이는, ‘돈이 최고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그 말을 한 사람을, 깊은 신뢰가 필요한 사람으로서는 대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도 이르게 한다. 다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실제로 이 선택 상황에서 돈을 우선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욕구만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사실은 다른 선택 상황의 경우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유형의 선택 상황은 어떤 것을 돈을 경유해서 누릴 것인가 아니면 돈 이외의 방법을 경유해서 누릴 것인가를 선택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간병은 돈을 저축해두었다가 간병비를 내고 받을 수도 있고, 배우자, 자식, 친구에게 간병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간병이 필요한 상황에 빠졌을 때 간병을 받고 싶어한다고 하자. 이 사람은 간병인을 고용할 필요성에 대비하여 돈을 더 벌고 저축을 할 수 있다. 대신에 돈을 덜 벌거나 저축을 덜 하지만 가족을 꾸리고 친구관계를 돈독히 하여 간병을 받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행위의 목적이 자신이 간병을 받는 것인 한, 돈으로 직접 사람을 고용하여 그것을 누리는 것보다, 돈 이외의 방법을 경유하여 그것을 누리는 것이 더 가치 있거나 품위 있는 방식이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분업사회에서 돈을 통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의 계획에 덜 간섭하고 다른 사람의 의사와의 합치에 더 가까운 방법을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에 어떤 것을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잘 해준다면, 다른 사람은 오히려 불투명하게 조작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설사 어떤 목적이 부분적 목적에 불구하더라도, 분명히 자기 목적 집합 속에 속하는 목적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불투명한 조작 말이다.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함으로써 어마어마한 책임을 당연히 기대할 것이라는 점을 투명하게 드러내었더라면 애초에 그런 관계에 진입하지 않으려고 할 사람들도 많다. 그러므로 이런 조작은 한낱 수단으로서의 대우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유형의 선택 상황이야말로, 논의의 생산적 가치가 가장 큰 영역이라고 할 것이다. 즉 이 영역 중 어떤 것들이 그 성질상 또는 행위자의 기질상, 처음부터 돈을 경유하여 누리는 것이 오히려 투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덜 주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삶의 목적을 형성하고 추구하는 존재라는 점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되는가의 논의가 생산적으로 될 수 있는 영역이다. 세간에서 그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비반성적으로 분류하였던 삶의 좋음 중 상당한 것들이 오히려 투명하게 돈으로 시장에서 교환을 통해 얻는 것이 나을 수 있음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런 경우 세간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불투명한 조작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서도 개인의 인격성을 더욱 존중하는 방법을 다른 사람이 취하는 것까지 막는 것임을 폭로할 nt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돈이 최고다’라는 말은 논의를 훨씬 덜 정교하게 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오히려 막아버린다. 그런 최고가치성의 표현은 어떤 것들이 시장 분업을 통해 얻을 수 있으며 또 주위 사람들을 조작하는 것이 아닌지 면밀하게 따지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간병의 경우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급작스럽게 개입하는 방해를 처음부터 예정하는 것보다 돈을 저축하여 그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낫고 또한 그런 사람을 고용한다고 하여 간병이라는 행위가 달성하고자 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터놓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우정의 관계는 시장 분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써서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돈으로 고용하여 친구를 만들 수는 없다. 피고용인은 고용을 하는 한에서 친구처럼 행위할 수는 있지만 친구는 아니다. 맛있는 고급 음식과 해외여행을 공짜로 제공해주는 것을 주된 방식으로 사용하여 친구를 사귈 수는 없다. 그런 대가를 바라는 사람들만 꼬이는 편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이 최고다’라는 포괄적인 단언은 두 가지 경우―간병 서비스와 친구―를 구별하는 작업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한다.
세 번째 선택 상황은 ‘돈이냐 여가냐’와 같이 돈과 그 이외의 가치를 선택하는 경우이다. 돈은 비특정적 수단적 가치를 가지며 또한 그런 수단적 가치의 성장시킬 수 있다. 비특정적 수단적 가치란 어디에 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래서 아직 다른 재화나 용역으로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진 않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그러한 용처에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자원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생기는 가치이다. 유동성이 높은 가치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부합하게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정보가 제약되어 있고 가치관의 형성이 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미래에 어떻게 사용할지를 유보하면서도 수단적 가치 자체는 저장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돈은 법적 자유와 비슷한 형태의 가치를 갖는다. 법적 자유가 있는 사람은 그 법적 자유를 실제로 행사해서 어떤 활동으로 나아가기 전에는 특정적 가치―특정한 활동으로 인해 얻게 되는 가치, 이를테면 조깅을 해서 얻게 되는 즐거움과 건강―를 누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체가 특정적 가치를 이미 담고 있지 않더라고 하더라도 가치가 없는 것이니 이미 특정한 활동을 하기로 정하지 않으면 법적 자유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돈은 분명히 비특정적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돈을 현명하게 투자하면 그러한 비특정적 가치를 미래에 더욱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돈의 비특정적 수단적 가치가 본유적 가치도 아니고, 수단적 가치 가운데서도 하나의 가치에 불과한 이상, 돈의 가치가 절대적 가치일리는 만무하다. 돈을 써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의 경험이 자신이 쓰는 돈보다 가치가 높다고 여기기 때문에 돈을 쓰는 것이다. 만일 돈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면 돈을 쓰는 그 어떤 행위도 비합리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극단으로, 돈은 종이조각에 불과하다면서 생기는 족족 쓰는 사람은 돈의 비특정적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위기를 대비한 돈도 갖지 못할 것이고,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려 지금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 미래에는 가능하도록 하는 계획도 세우고 실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즉 양 극단의 비합리성 사이에 각자의 여건과 기질에 따라 합리적인 범위가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도 생산적인 논의가 두 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전형적인 사람의 인생 경로상, 각 시기별로 돈을 어느 정도 아끼고 어느 정도 쓰는 것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자신과 같은 가치관과 인생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돈을 얻거나 아끼는 데 얼마만큼 비중을 둘 것인가에 대하여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하다. 이것은 상당한 정도로 주관적인 선호의 영역이겠지만, 앞서 두 비합리성의 극단에서 예시를 보았듯이, 합리성에 의거한 토론이 전혀 소용 없는 영역 또한 아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선택 상황의 경우에도 ‘돈이 최고다’라는 진술은 과장되어 있고 지나치게 일률적이며 실질적인 것을 논의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 어떤 이유에서 돈이라는 비특정적 가치가 우선될 것인가에 관한 정교하고 자세한 논의를 오히려 막는 것이다. 오히려, 돈이 마치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양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전달하므로 생산적인 논의를 막는다.
결론적으로, 처음부터 ‘돈이 최고다’라는 표현은 꺼낼 필요조차 없었으며, 꺼내는 바람에 오히려 생산적이 논의를 막았다. 처음부터 세 가지 선택 상황에서 돈의 가치가 실천적 이유로서 어떤 지위와 역할, 비중을 갖는가를 정교하게 주장하는 진술로부터 곧바로 시작하는 것이 나았다. ‘돈이 최고다’라는 표현은 그렇게 정교한 주장에 관한 공방을 함에 있어서 시작 시점에도 중간 시점에도 종결 시점에도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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