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무엘 프리먼의 <정의와 사회계약Justice and the Social Contract>의 제3장을 완역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사무엘 프리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공리주의는 상충하는 이해관심과 규칙들의 우선순위를 확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강력한 도덕관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 강점은 공리주의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는' 결과주의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강점은 오로지, 공리주의가 "지배적 목적 dominant end"를 상정하고, 다른 목적과 가치들을 이 지배적 목적인 효용으로 환산하여 계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론가들은 이 강점의 연원을 엉터리로 파악한다. 즉, 칸트식의 의무론은 '비결과주의'이여서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행동만 똑바로 한다고 하고, 공리주의와 같은 '결과주의'는 결과를 고려하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모든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덕 이론은 결과를 고려한다. 그렇기 때문에 롤즈는 결과주의를 하나의 독립된 도덕이론의 분류 항목으로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자. 이제 공리주의가 이런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당연히 그 때문에 약점도 생긴다. 결국 우선순위 확립의 기준은 '효용'이다. 그런데 이 효용을 최대화한다는 발상은 인간이 어떠한 성품도 목적도, 애착도 갖고 있지 않고 유쾌한 느낌만을 최대화하려는 동기로 움직이는 '벌거숭이 인간', 즉 걸어다니는 그릇(container)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공리주의의 문제점들은 윌 킴리카의 <현대 정치철학의 이해>(국내번역있는 훌륭한 정치철학 교과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군의 이론가들은 공리주의의 지배적 목적 가정에서는 탈피하면서도, '결과'를 동시에 고려해서 더 좋은 이론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한 방식은 '증진되어야 하는 좋은 결과'에 '평등한 권리와 공정한 절차' 같은 정의의 원칙들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런 것이다.
권리 (충족되고 증진되어야 할 것) - 그냥 돈, GDP, 행복 (충족되고 증진되어야 할 것)
이 모두를 최적으로 증진시키자!
그러니 어떨 때는 돈을 희생시키고 권리를 충족하고, 어떤 때는 행복을 희생시키고 권리를 증진하자.
이런 식의 사고는 매우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토대와 근거를 갖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계약론적 토대는 분명히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계약론적 이론은 이미 권리를 규정할 때 좋은 결과들에 대한 이해관심들을 다 고려해서 최종적으로 권리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권리와 누구의 돈을 맞교환시키는가? 누구의 관점에서? 이것이 모두 불분명하게 된다.
예를 들어 버스에서 정차 시에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결정한다고 해보자. 버스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젊은이도 있고 노인도 있다. 버스 정차 시간을 짧게 하면 버스가 빨리 가고 교통체증이 줄어든다. 그러나 너무 짧으면 제대로 내리질 못하며 사고의 위험이 있다. 제일 문제되는 것은 노인들이다. 노인들은 제일 느리다. 그런데 이 노인들도 온전한 버스 이용자로서 안전한 버스 서비스를 누려야 한다. 그러므로 노인이 타고 내릴 때에는 노인을 기준으로 필요한 시간을 정차에 할애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계약론적 관점에서 차등의 원칙과 동일한 결과다. 그리고 이것이 정의로운 결과다.
이제 혼합 결과주의 논리에 의해서, 이것을 다시 "교통 체증의 감소와 부의 극대화" 같은 것과 형량한다고 해보자. 교통 체증의 감소와 부의 생산은 계약론적으로 정차 시간을 고려할 때 이미 고려된 사항이다. 이것을 고려했기 때문에 노인을 기준으로 필요 시간 정차하고 그 이상의 긴 시간은 정차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형량한다고? 도대체 왜? 이건 반복적, 중복적 고려이며, 도대체 형량하는 관점이 무엇인지조차 명백하지 않다. 젊-노인이라는 키메라가 이런 형량을 결정짓는가? 이것은 다시 계약론의 강점을 모두 버리고 공리주의의 '사회 통합'의 용광로의 단점을 모두 받아 안게 되는 짓이다.
사람들은 정의와 GDP를 형량한다는 아이디어를 손쉽게 받아들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의는 이미 GDP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관심을 반영하여 확정된 것이다. 거기다 다시 GDP를 고려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또 고려하고 100번 고려하여 정의의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은 왜 안되는가? 어차피 무한 루프 반복짓인데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단순한 공리주의적 사고보다 이런 혼합 결과주의의의 어거지 사고가 만연해 있다. 너무 정의만 따질 수 없고 다른 좋은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순환논리이거나, 아니면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직관주의 논리에 불과하다.
이 글에서 사무엘 프리먼은 그 외에도, "공지성" "안정성" 조건을 다루면서, 그 조건들이 정의의 원칙을 평가하는데 도입되는 이유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한다.
특히 안정성 조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
최근에 읽은 만화 중에 <도서관 전쟁>이라는 만화가 있다. 일본에서 도서양화위원회가 풍기를 문란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도서들을 검열하고 압수한다. 그러자 도서관들이 뭉쳐서 도서관 방어대를 구성해서 도서관을 무력으로 지키면서 또한 서점에서도 특별히 보호하는 서적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일종의 이중 권력 상황이다. 양화위원회의 활동을 근거지우는 법도 존재하고, 도서관의 권한을 근거지우는 활동도 존재한다. 이 두 기구는 일종의 권력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전쟁은 서로 피한다. 이것이 바로 잠정적 타협 상태다. (modus vivendi) 그러나 이런 잠정적 타협 상태는 힘의 균형에 의한 것 뿐이며, 어느 쪽이든 힘이 우세하게 되면 그 균형을 깨려고 한다. 그렇기 때뭉네 그 안정성은 "옳은 이유에 의한 안정성"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복지국가"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며, 공리주의의 발현태라고 보는 롤즈의 시각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롤즈의 대안은 "민주적 사회주의"나 "재산소유 민주주의"인데, 롤즈는 후자에 더 강점을 두고 있다. 재산 소유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분점된 사회이며, 이에 가장 가까운 발상은 시장사회주의 논쟁 5세대에서 제출된 각종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의 전망이나 존 로머의 쿠폰 경제 전망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여러 쟁점에 대해 이해를 크게 도우므로 필독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