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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번역] 롤즈의 "알렉산더와 머스그레이브에 대한 답변"

by 시민교육 201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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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롤즈의 <정의론>에 대하여 알렉산더와 머스그레이브라는 학자가 제기한 반론에 대답하면서, 공정으로서 정의에 대한 오해를 푸는 논문입니다. 이 논문은 롤즈에 대한 오해와 그 오해에 기반한 반론이 타당하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필독해야 하는 논문입니다. 제가 이미 번역하여 게시한 <Restatement>의 중요부분과 함께 읽으시면 더욱 풍부한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래는 롤즈의 본 논문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롤즈 글을 직접 읽는 것보다는 이해가 빠를테지만 생략된 부분이 꽤 있으니 참조용으로만 사용)

 

 

 

1. 알렉산더는 뭐라고 했나?

 

 

알렉산더는 공리주의도, 공정으로서의 정의도 틀렸다고 합니다. 둘 다 균형을 못잡고 극단으로 갔다는 겁니다. 세상의 가치는 두 가지, 즉 총 효용과 평등분배인데, 이 둘 사이에 적정한 균형을 잡는 정의관이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i) 공리주의는 총 효용에만 비중을 뒀으니 극단적이고 ii)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평등분배에만 비중을 두었으니 극단적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 중간을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2. 머스그레이브는 뭐라고 했나?

 

머스그레이브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최고의 정의관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차등의 원칙, 즉 “최소수혜자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한 불평등의 증가는 허용할 수 없다”는 원칙은 차선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머스그레이브는 특히 재능의 불평등이 완전하게 보상될 것을 주장합니다. 즉, 재능에 따라 차등적인 인두세를 매기는 방안이 좋다는 것이지요.

 

알렉산더는 롤즈보다 오른쪽에서의 반론을, 머스그레이브는 롤즈보다 왼쪽에서의 반론을 대표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위 두가지 반론 중에 알렉산더의 반론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더 일반적일 것입니다.

 

 

3. 오해에 답하기 위한 예비적 설명

 

 

롤즈는 알렉산더와 머스그레이브에 답하기 위하여 먼저 질서정연한 사회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왜냐하면 적절한 정의관이란 질서정연한 사회에 어울리는 정의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정의관은 질서정연한 사회의 특성과 제약을 지키는 정의관이어야 합니다.

 

 

(1) 질서정연한 사회란 무엇인가? (다음 1부터 12)

 

 

1. 모든 이들은 동일한 정의 원칙(동일한 정의관)을 받아들이며, 다른 이들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안다.

2. 기본적인 사회제도와 그것을 하나의 제도scheme (사회의 기본구조)로 만드는 질서(arrangements)는, 이 원칙을 충족시키며, 모든 사람들은 근거를 가지고서 그 사실을 믿는다.

3. 공적 정의관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탐구의 방법에 의해 확립된 합당한 신념에 기초한다.

4. 그들 각각은, 규범적으로 효과적인(effective) 정의감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를 정의감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 (정의감의 내용은 공적 관념의 원칙에 의해 규정된다) (이 관념에 따라 행위하고자 하는 욕구가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행동을 결정한다.)

5. 그들은 각자, 그 선관의 명분으로 그들의 제도를 고안함에 있어 서로 간에 요구를 하는 것이 합당한, 근본적인 목적과 이해관심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를 그러한 존재로 여긴다.

6. 그들은 각자 그들의 사회의 기본구조를 결정할 원칙을 결정함에 있어 평등한 존중과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스스로를 그러한 존재로 여긴다.

7. 기본적 사회제도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지지하는 정의감을 낳는다.

8. 적정한 희소성의 조건이 존재한다.

9. 근본적인 이해관심과 목적의 차이(divergence)가 있으며, 상치되며 양립불가능한 다양한 신념들이 있다.

10. 기본적 제도의 구조는 상호에게 이득이 되는 사회 협동의 대략(more or less) 자급자족적이며 생산적인 구조이다.(scheme)

11. 정의의 원칙의 역할(공적 관념)은 사회의 기본구조에서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고, 이득과 부담의 전반적 분배에 제도가 영향을 미치는 적정한 방식을 명시(specify)하는 일이다. 거기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덧붙인다.

12.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의 기본구조(즉, 기본적 사회제도와 하나의 구조로의 그것들의 질서that is, basic social institutions and their arrangement into one scheme)를 정의의 기본 주제(정의의 원칙이 우선 적용되어야 할 사항)로 삼는다.

 

 

 

위 각 항목들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1)-(7)은 질서정연한 사회라는 관념을 구체화한다. (1), (2), 그리고 (3)은 공지성의 특성을 서술한다. (characterize publicity). (4), (5), 그리고 (6)은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인간이라는 이념의 내용을 이룬다. 그리고 (7)은 안정성 조건으로, 목록의 이 부분의 마지막을 이룬다. (8), (9) 그리고 (10) 조건은, 정의의 여건의 특성을 설명하며, 이는 정의론에 적합한 상대적인 경우들의 집합을 한정한다. 그리고 (11)과 (12)는 정의의 역할과 주제를 기술한다.”

 

 

(2) 원초적 입장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인가?

 

원초적 입장은 자의적으로 이것저것 모르게 해서 베일을 씌운 그러한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질서정연한 사회의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정의관을 선택할 때 가장 적합한 ‘관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초적 입장에서 당사자들은 자연과학과 사회이론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정보를 갖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은 (3)의 조건(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탐구의 방법에 기초한 합당한 신념을 갖는다)을 충족시킵니다.

 

 

원초적 입장은 결국, 질서정연한 사회의 조건과 결합해서 정의관을 산출하기에 적절한 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원초적 입장의 기술은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공정한 상황이어야 한다. 둘째로, 당사자들은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3) 첫번째 쌍 비교 : 기본적 자유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정의의 두 원칙 대 공리 원칙을 비교해보자.

 

 

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자유로운 도덕적 인간을 대표하기 대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가능하면 보호해야 할 근본적인 목적과 이해관심, 요구를 갖고 있는 존재로 여깁니다. 종교라든가, 어떤 예술적 가치관 등등.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이해관심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조건을 마련하고자 하는 최고차적 이해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계산에 고려되는 사실들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그런 이해관심을 보장받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연에 최고차적 이해관심의 충족을 맡겨둔다면, 그건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이 자유로운 도덕적 인간을 대표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대신에 일종의 그릇으로의 인간으로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제1원칙, 즉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보장을 택하게 됩니다.

 

② 공지성 효과.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채택된 원칙들은 공적인 조건이며, 이는 공지성의 효과가 평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이다. 자존감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추구할 가치가 없으며, 어느 것이나 그다지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은, 평균 공리의 기준에 부합하는 원칙보다는 정의의 원칙을 만족시키는 사회제도에 의해서 그들의 자부심(self-esteem)이 지지되고 더 확실히 갖게(confirmed)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도들은 그 원칙들에 의해서 그 제도들이, 모든 이들은 평등한 기본적 자유를 가져야 하며 사회 ․ 경제적 불평등들은 최소극대화의 기준에 의해 규제될 것이라는 집단적 의도를 만족시킨다는 사실이 공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공언(announce)하기 때문이다.”

 

③ 근본적 이해관심이 형성되는 조건에 대한 관심.(자유로운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가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화학약물을 주입받아 그 신념을 가지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 신념이 정말로 좋은 것이라도 그건 화학약물의 꼭두각시로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뇌 속에 담길 어떤 신념에 근본적인 속박된 존재라 아니라, 그 신념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존재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여건은 오직 기본적 자유의 평등한 보장이라는 제1원칙에서 확보되지, 평균 공리를 위해서 사람을 그릇으로 다룰 수도 있는 평균 공리의 원칙에 의해서 보장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번역자의 견해를 첨가하자면 특히 적응적 선호의 문제를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전 국민들에게 단 것을 금지하고 강제로 굴리면서 초코파이를 준다면 초코파이에 대한 미각이 예민해져서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쪽으로 선호 자체가 변한다면 평균 공리는 자유를 침해하고 올라갈지 모르나, 자

유로운 인간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4) 기본적 가치를 비교의 지수로 삼는 것은 왜 질서정연한 사회의 관념에 부합하는가.

 

“(a) 기본적 가치들은 사회적 제도 및 사람들의 상황을 그것에 관하여서 본 (with respect to them) 특정한 객관적인 특성들이며 따라서, 전반적인 만족이나 불만족의 척도가 아니다. 그리고 (b) 이 동일한 기본적 가치들이 모든 이들의 사회적 여건을 비교하는 일에 사용된다.” 사람은 경험이나 욕구 충족을 담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열망의 강도나 만족의 정도에 의해 그 사람의 지위를 비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람들은 여건에 비추어 그들의 소망과 목적을 통제하고 수정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할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로 여긴다. (정의의 원칙들이 충족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 면에서 사회는 (society on its part) 일정한 기본적 자유와 기회를 유지할 책임을 맡으며, 그 틀 내에서 기본적 가치의 공정한 몫을 제공하여 개인과 집단이 그에 따라 그들의 목적과 선호를 형성하고 수정하는 일을 각각 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질서정연한 사회의 구성원들 간에는, 시민으로서 그들은 일정한 종류의 요구만을, 정의의 원칙에 의해 허용된 요구만을 표명할 것이라는 이해가 존재하게 된다.”

 

 이 점에서 특정 종교를 국가가 가질 것을 강요하거나 하는 일은, 설사 그런 종교를 가지는 것이 더 많은 만족을 가져온다고 하여도 허용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 종교에 유리하느냐 불리하느냐의 기준으로 정의관을 선택해서는 아니되며, 만족의 척도가 아닌 기본적 가치의 척도로 사람들의 평등한 지위를 평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알렉산더에 대한 답변.

 

 

알렉산더는 동일한 수학 공식의 형태에서 ‘총 효용’, ‘평등 분배’라는 두 가지에 부여하는 비중의 값을 변화시킴으로써 한 도덕관으로부터 다른 도덕관으로 매끄럽게 이동할 수 있다고 함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우선 효용 U'가 언급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 그것을 중심 기준으로 채택하는 것이 왜 의미 있고 적절한지를 도덕 이론에 비추어 설명하는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정의관 사이에서 선택을 할 때,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을 동일하게 둔 채로 a만 달리 선택하는 경우들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리주의가 총 효용에만 관심을 둔다고 하였을 때 그것은 단지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그릇으로 보는 인간관이라는 특정 인간관을 이미 채택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정적 관망자라는 발상이 필수적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모든 욕구들을 하나의 욕구체계에 속하는 것으로 계산하며, 마치 이 체계가 단 한 사람, 그 자신에게 속하는 것처럼 순만족량을 측정한다. 모든 사람들이 단일 존재로 붕괴되므로(collapsed into) 소위 분배는 가치에서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평등한 비중의 할당에 깔려 있는 것은, 만족과 불만족을 담는 단순한 용기로서의 자아라는 관념이다. 자아는 경험의 복합을 담는 보지자로만 여겨지며, 이 경험들의 가치는 각자에게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 경험들의 총 가치는 사람들의 (경계선인) 구분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데, 이는 저장통(reservoirs)에 물이 어떻게 분배되느냐에 따라 물의 양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론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공식은 마치 이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문제를 잘못 표현합니다.

 

 

5. 두번째 쌍 비교: 왜 최소극대화 원칙은 위험 기피 원칙의 반영이 아닌가.

 

“첫눈에 보기에는 최소극대화 기준이 위험기피에 대한 극단적이고 자의적인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이것이 잘못된 생각일까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교를 생각해봅시다. 즉, 기본적 자유는 두 정의관 모두에서 보장이 되지만, 첫번째 정의관에서는 최소치를 보장하고 그 최소치 이상에서는 평균 공리의 원칙을 적용하고 두 번째 정의관에서는 차등의 원칙(최소극대화 원칙)을 적용한다고 해봅시다. 이 둘 중 어느것을 골라야 할까요? 위험기피가 논의의 전부라면 두번째 것이 첫번째 것보다 우월할 이유가 없습니다.

 

 

(1) 기본구조의 특수성과 평등한 지위에서의 출발

 

여기서는 기본구조의 특수성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본구조는 단 한번의 게임, 주식투자, 복권, 도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 경제적 불평등을 규제하는 근본 원칙입니다. 이 근본 원칙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독립적인 인간의 자유와 자존감에 심대한 훼손을 가져오는 누적적인 효과가 쌓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최초의 우리의 출발점, 누가 잘생기고 못생겼으며, 누가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누가 머리가 좋고 나쁜지라는 도덕과 무관한 사실에 의해서 크게 영향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어떤 원칙에 비추어, 민주적 제도 하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도덕적 인간이, 사회적 우연과 자연의 복권추첨에 그들의 관계가 영향 받는 것을 허용하는가?” 개인들은 재능의 분포에서 그들의 위치나 사회에서의 출발 위치에 대하여 응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응분은 답이 아닙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은, 그 운의 영향이 어떤 원칙에 의해서 -만일 합당한 원칙이 존재한다면- 규제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연적 분포 자체는 도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태풍처럼 그냥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에는 인간들의 재능의 차이라는 분포 자체를 집단적 자산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게 문제를 해결합니다. 즉, “불평등이 운이 덜 좋은 이들을 위한 상응하는 이득을 산출하는 것에 필요한 것 이상의 불평등이 없다는 전제에서, 그리고 평등한 민주주의적 자유가 불리하게(adversely affected) 영향 받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능력의 전 범위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동일한 제약조건이 사회계급 사이에서 성립합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득을 얻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의해 움직일 때, 불평등을 규제하는 기준으로 채택될 것”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엄격한 평등에 출발하여 실제로 개인들이 받을 것을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나온, 엄격한 평등(strict equality)과 (기본적 가치로 측정된) 평균 이득의 극대화 사이의 자연스러운 중심점(focal point)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러한 논증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특이하거나 특수한 위험 기피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 바는 없습니다.

 

 

(2) 제약 조건과 공약의 부담

 

 

공약의 부담이란, 어떤 약속을 하면 그것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실제로 기꺼이 지킬 수 있으리라는 부담을 제대로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약의 부담에 근거한 논증은 “계약”에 독특한 것입니다. 반면에 알렉산더는, 계약 개념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합리적 선택 개념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샌델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원초적 입장에서의 선택은 어차피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어서 다 똑같은 입장에서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도저히 계약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타당하지 않은데, 이는 합리적 선택과 합당한 계약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계약은 합리적 선택과 구별되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 그것은 … 스스로를 서로에 대하여 요구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여기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구별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개인들은 용기로서의 인간, 즉 단지 만족이 발생하는 장소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라는 것이죠.

 

 

둘째로 계약 관념은 폭넓고 복잡한(intricate) 영향(ramifications) 가진 공지성 조건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정의관은 공지성 효과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은밀한 총독부 공리주의 같은 것은 이 점에서 큰 약점을 갖게 됩니다.

 

 

셋째, 계약이라는 개념(계약 조건)은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에게 추가적인 제약을 도입합니다.

 

의문: “원초적 입장에서의 합의는 만장일치여야 하는데, 모든 이들이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모두가 동일한 원칙을 기꺼이 채택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협상해야 할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합의할 필요가 왜 있는가?”

 

 

답변: “사람들이 약속하고 있는 바가 모든 이들의 숙고에 동일하게 영향을 미쳐 그 결과로 나오는 합의가 나오는 것은, 모든 이들이 각자 동일한 선택을 내린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것들의 집합은, 합리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것들의 집합에 포함되며 그것보다 작다. 우리는, 모험을 해봄과 동시에(to take a chance) 결과가 나쁘게 되면 우리의 상황을 복구(retrieve)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리라는 의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합의를 할 경우엔,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따라서, 신의성실하게 약속하기 위하여(and therefore to give an undertaking in good faith) 우리는 그것을 존중할 의도를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를 갖고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질서정연한 사회의 시민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무엇이건, 그 질서가 그들의 정의관에 비추어 받아들일 만하다고 모두 생각한다. 어떤 이들도 그들의 상황을 모욕적이라거나 비하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되며, 그들이 소심함과 억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억울하게 여기면서(resent) 묵인(acquiesce)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계약 개념은 공약의 부담에 근거한 논증에 이른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원칙들의 일관된 적용의 결과를 존중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의문시할 이유를 가진다면, 그 원칙에 합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제약조건(limitation)은 모든 사람들의 숙고에 동일하게 영향을 미친다.”

 

 

최소치를 가진 평균 공리의 관점은 오직 사회적 최소치만을 받으며 이등 시민으로서 근근히 살아가는 존재를 허용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위치를 허용하거나 요청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정으로서의 정의 관념은 모든 사람들이 모든 여건에서 존중할 수 있는 질서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공약의 부담에 비추어 두 번째 관념이 합의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공약의 부담에 비추어 합당한 정의관이,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어냅니다. 공약의 부담이 너무 무겁다면, 그 사회는 기회만 있으면 뒤집어 엎으려는 사회가 되며, 불안정한 사회가 됩니다. 즉,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공약의 부담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를 실제로 확보하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저점에서 완전한 무지의 함의가 그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함의는, 원초적 입장의 사람들이 최악의 결과를 고려하고 그것을 진정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하여도, 계약 조건은 더 큰 요구조건을 부과한다. 당사자들은, 그들이 신의성실로 받아들이기를 합의할 수 없는 각각의 가능한 결과의 모든 위험을 거부(decline)하여야 한다.”

 

 

5. 머스그레이브에 대한 답변.

 

답변의 핵심 : 머스그레이브의 제안은 자유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토대가 없고, 실제적으로도 실행 불가능하다.

 

“나는 천부적 재능에 대한 인두세라는 발상이 단지 실제적인 난점 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천부적 재능이, 이론적으로라도, 인두세 과세라는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측정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지조차가 의심스럽다. 만일 예를 들어 측정가능하고 고정된, 머릿속의 컴퓨터이며, 한정적이고 불변하는 사회적 용도에 쓰인다면,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능은 예를 들어 고정된 천부적 재능이라고는 거의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상이한 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되고 양육되는 무수히 많은 차원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실현된 것에 반대되는 의미로 잠재적인 것의 의미에서조차 능력은, 거의 파악되지 않고 복잡한 방식으로 상당한 정도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능력들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중에는 그들의 훈련과 인정과 직접 관련된 사회적 태도와 제도가 있다. 그러므로 잠재적인 소득 능력은 사회 형태 및 인생 경로에서 벌어지는 특유한 우연과는 독립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그 인두세라는 발상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지만, 인생의 어느 시기에 그 능력이 측정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이러한 난점 중 어느 것도 최소극대화 해석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의 천부적 재능이 무엇인건 간에, 그리고 사회적 여건이 재능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건 간에, 어느 누구도 모두의 이득에 기여하는 방식 이외로는 이 우연들로부터 이득을 얻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