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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립물] 결혼을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 자발성과 후견주의

by 시민교육 2013. 10. 20.

"넌 결혼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

30대 후반의 한 남성과 술을 함께 먹던 친구가 놀려댄다. 이 친구의 진술은 참인가 거짓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보기보다 간단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안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못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도록 장애가 되는 외부의 이유가 있어 비자발적으로 미혼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 얼핏 간단해 보이는 진술에는 몇 가지 복잡한 쟁점을 발생시키는 지점들이 있다.

우선 '결혼'이라는 매우 광범위한 상황을 포괄하는 단어로 지칭되는 활동과 결부된, '할 수 있는 능력'의 기준점이 명확하지 않다.

 

100미터를 105에 달릴 수 있는 능력? 이것도 고산지대에서 달리느냐, 평지에서 달리느냐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보통은 호흡에 큰 문제가 없는 트랙에서 달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100미터를 몇 초에 달리느냐 하는 등과 같은 외적 기준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사람과 하느냐'의 내적 기준이 필연적으로 포함되는 활동이므로, 그 능력의 준거를 제대로 고정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그 친구와 술을 마시던 남성을 좋다고 계속 쫓아다니는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이 남성이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굴하지 않고 따라다니며 옆에만 있어준다면 그 남성이 손가락 까딱하지 않아도 해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언은 매우 신실해보인다. 그런데 이 남성은 그 여성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 이 남성이 스스로 많이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그 여성은 그 남성의 눈에는 전혀 매력이 없다고 하여보자.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 남성이 좋다고 하는 여성들은 그 남성을 매력있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하자.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그 쫓아다니는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남성이 친구에게 말한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그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이니, 나는 결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이 때, 시니컬한 친구는 말한다. "결국 네가 눈이 높다는 거 아냐 . 눈이 높아서 미혼 상태로 있는 것은 결혼을 못하는 것이지."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말한다. "눈을 낮춰야 해~. 그러다간 결혼 못해~" 그러자 다른 친구가 원래의 남성에게 동조하듯 말한다 "나이 먹어서 눈 낮추기가 쉽지 않지."

 

이러한 당사자 및 친구들의 진술을, 처음의 구분 명제에 비추어 판단해보자. "눈이 높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자신이 결혼이라는 활동을 정의하는 기준을 설정했는데 그 기준을 현실적으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은 외적 기준이 아니라 내적 기준이다. 그 내적 기준에 의하면 "결혼을 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결혼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내적 기준은 스스로 정하는 기준이므로 자발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결혼을 하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결혼을 안하는 것이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결혼이라는 활동 자체를 거부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 그룹을 절대적 독신주의자라고 하자. 이들은 결혼 서약 자체를 자기 삶의 가치나 행복을 규정하는 신조 차원에서 거부하는 이들이다. 상대가 누구이건심지어 어떠한 가상의 유리한 여건에서건 상관없이. (한마디로 판단자 스스로도 부와 미모와 지성과 성격에서 최고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뭐든지 편하게 다해주겠다며 결혼을 구애한다 해도 하기 싫다는 사람들이다.) 즉 어떠한 가상적인 상황을 들이댄다 하여도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일단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에는 결혼은 안하는 것이라고 기술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의 미혼 상태를 ""하고 ""한다고 기술하는 명제들은 참, 거짓이 그 화용의 맥락에 따라 불확정적인 것이다. 문제는 일상용어 자체에는 기본적으로 이 맥락을 고정하는 추정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비절대적 독신주의자 K씨가 있다고 해보자. K씨는,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외모와 성격, 그리고 지성을 가진 배우자 후보가, 양육 부담과 부양 부담을 지우지 아니하고, 결혼하고서도 삶에 크게 간섭하지 않고, 외국에 몇 년씩 나가서 돈을 벌지도 못하는 연구활동을 하는 것을 이해하고 허용한다면 결혼하겠다고 한다. K씨의 바람이 본질적으로 결혼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결혼이 한 당사자에게 부양과 양육 부담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결혼이 일생동안 외국에서 많은 기간 지내면서 돈도 안되는 자기 일을 하는 것을 불허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물론 K씨는 현실에 그런 상대방이 아마도 사실상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사실 자신이 그런 계획의 일부만 밝혔을 때에도 잠재적 후보들은 극도로 싫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미혼상태다.

 

또다른 비절대적 독신주의자 L씨를 보자. L씨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흥미가 없기 때문에, 시장에서 나와 돈을 벌지 않고,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며 지내고 싶어 한다. 다만 배우자가 충분한 돈을 벌어와야 한다. 세후 500만원은 벌어야 한다. 그리고 배우자의 외모는 중간 이상이어야 한다. 물론 성격이 이상한 파탄자이거나 괴팍한 사람이어서는 안됨은 물론이다. 또한 배우자의 부모가 부유하여 결혼생활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긴 하되, 결혼생활에 간섭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L씨는 소개팅조차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런 기준에 만족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 K씨와 L씨에게 "너는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려면, K씨의 인생계획과 그로 인해 파생된 기준들이 "외부적인 장애"라고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인생계획이고 '그의 내적인' 기준들이다. 인생계획과 내적 기준들은 반성적인 선택의 대상이며, 롤즈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그러한 계획과 기준들이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즉 그것들의 포로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안'하는 측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K씨가 이미 부유하고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라면 결혼을 하고 나서도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외국에 나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일과 결혼이 전혀 상충하지 않게 되어, K씨가 스스로 진술하는 것처럼, 결혼을 금방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K씨는 부유하지도 그다지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것은 '외적인 장애' 또는 '자기 통제를 벗어난 외적인 능력 부족'으로 자신의 자아실현과 현실적인 여건에서는 상충하는 결혼을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상대가 누가 되었건 결혼 하는 것 자체를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목표로 전제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조건을 내걸로 찾으면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며, 왜 환상을 좇고 있느냐라는 지적을 할 수는 있을 것이라며. 그리고 그 환상을 아무리 지적해줘도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K씨와 L씨가 고집한다면 그들은 일종의 정신적 장애 상태에 빠진 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정신적 장애라면, 그들은 결혼의 문제에 관하여 어떤 자발적인 의사결정능력(competence)이 없음을 뜻한다. 결국 그것은 통상적인 결혼적령기에 결혼상태에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의사무능력자로 몰게 된다.  그리하여 국가가 정상 상태(normal state)인 기혼 상태를 강제하기 위하여 비정상상태abnormal state인 미혼상태로부터 그들을 빼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인생 목표의 중대성에 관한 신조를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모든 영역의 행위에도 성립한다. 즉 A를 인생에서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떤 장애로 인해 비합리적 행위로 강제되었다는 전제를 도입한다면, A를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정신적 장애 상태에 빠졌다고 몰아댈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A라는 활동이 자신의 인생의 여건과 기질에 비추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을 타인이 탈취하여 규정할 지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위를 인정하게 되면,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정신적 장애에 빠져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게 된다. 결혼은 속세의 잠깐 지나가는 일에 불과하고 특정 종교를 믿지 않으면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므로 이것이야말로 중차대한 일이 될 터이므로, 그 정신장애야말로 심각한 것이라는 근거를 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승인하는 신조를, 그들의 신조 결정권을 탈취하면서, 타당하다고 우겨넣은 다음 그 사람들의 행위를 강제하는 경우,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주체들의 관계는 완전히 어그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 장애 논변과 비슷한 모든 논변은, '가치'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기반 위에 있어야 한다는 가치 담론의 화용론적 전제를 위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K씨와 L씨의 결정은, 그들의 정신적 의사결정능력이 생리적인 기준에서 훼손되었다고 볼 충분한 증거가 없는 한, 온전한 성인으로서 할 만한 가치있음(worthwhileness)에 관하여 판단을 내린 결과이다. , 이들들은 디폴트로 미혼 상태를 그리 나쁘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떠어떠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미혼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반면에 미혼 상태를 디폴트로 매우 나쁘게 보는 이들은 할만한 가치 있음 판단을 전혀 달리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할 만함의 판단을 국가권력을 통하여 강제로 부인하는 것은 개인적 주권성(personal sovereignty)을 부인하는 것이다.

 

결국 결혼과 관련된 어떤 상태를 모든 화용의 맥락에서 자발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모든 화용의 맥락에서 비자발적으로 보는 견해도 타당하지 않다. 결혼을 ''하느냐 ''하느냐는 진술은 맥락을 고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 맥락은 외적 여건과 내적 기준 모두를 주어야 고정된다. 절대적 독신주의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한편으로는 결혼을 안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혼을 못하는 것이다. 이 점을 편의대로 부정하고, 상대방이 결혼을 못하는 것이라거나 나는 결혼을 안하는 것이라고 맥락도 고정치 아니하고 단언하는 사람은 결혼이라는 것이 '할 만한 가치 있음'이 어떠한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보편적인 것으로 투사하고 있을 뿐이다. (, 그는 사실판단으로서 장애obstacle 판단이나 능력capability 판단, 또는 자발성voluntariness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혼이라는 특정 상태에 결부시키는 가치와, 결혼이라는 상태에 결부하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한 다음, 그 판단을 다른 사람의 결정권을 탈취하는 화용의 맥락에서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불황과 일자리의 불안정성 증가(외적 장애요소의 증가), 그리고 동시에 높아진 결혼생활수준에 대한 기대(내적 기준의 상승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의 결혼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기사에 대해 어떤 노인이 "요즘 젊은이들은 배때지가 불렀어. 썩을 놈들. 우리 땐 월세 단칸방에서 애 셋을 낳고도 살았어."이라고 할 때, 그는 문제 해결에 유용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결혼이라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서라도 그리고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하더라도 할 만한 가치 있다는 자신의 인생기획에 관한 신조를 재공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판단을 사회적인 정책 수립에 뒤섞는 이들은 정제된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정치철학과는 관련 없는 이 언어 분석은, 자유 상태의 파악과 후견주의의 문제에서 중요하다

 

이 고찰이 드러내는 논지 중 하나는, 여러가지 맥락 중 어느 일부 화용의 맥락에서 '자발성'이 없다는 진술만으로는, 행위에 관한 개입 정책을 지지하는 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실제로는, '할만한 가치 있음'에 관한 특수한 파단을 투사해서 다른 이의 판단이 '현명하지 못하므로' 그 판단을 무시해버리려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논지는,, '자발성'에 대한 판단은 해당 행위를 어떻게 기술하느냐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지며, 맥락을 먼저 고정하여, 그 고정된 맥락과 동일한 추상 수준에서의 다른 사안에서의 해결책과 비교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발성'은 두꺼운 행위 기술(thick act-description)에서 언급하느냐, 얇은 행위 기술(thin act-description)에서 언급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는 점은 조엘 파인버그가 그의 탁월한 역작 중 하나인 <Harm to Self>, p.129에서 지적한 바 있다

 

파인버그가 재인용한 아네슨(Arneson)의 예에서, 어떤 사람이 소금통에 담긴 비소를 계란 후라이에 촥촥 뿌린다. 그는 그 비소가 소금인 줄 안다. 이 때 그의 행위를 "내가 소금이라고 믿는 것을 내 음식에 뿌린다"고 기술할 수도 있고, "내가 먹을 음식에 치명적인 독극물을 뿌린다"고 기술할 수도 있다.

이 때, 그의 행위는 자발적인가.

전자로 기술할 때에는 자발적이고(소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대로 뿌리고 있으므로), 후자로 기술할 때는 비자발적이다(독약을 전혀 뿌리고 싶은 의사가 없는데 독약을 뿌려서 먹을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얇은 기술에서는 자발적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두꺼운 기술에서는 비자발적이라고 판정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어느 기술을 채택할 것인가는 언어의 내재적 논리 자체로 고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용법을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지침이 되는 '화용의 목적'에 따라 상대적으로 고정될 뿐이다.

 

만일 화용의 목적을, 자발성에 관한 모든 이상적 기준을 충족하는 행위가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이렇게 되면 진정으로 자발적인 행위는 단 한 가지도 없게 된다. 자발성은, 정도(degree)의 성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자발성의 여러 기준들을 모두 완전하게 다 충족하는 이상적 자발성의 사례는 현실에서는 없기 때문이다. (Feinberg, Ibid, p.115-118)

 

그래서 개입의 가능성이라는 분석의 목적에 의하면, 자발성은, 그 불충족을 판정하는 기준을 높게 세우거나 낮게 세움에 따라 충족과 불충족이 다르게 판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악의 중요성과 해악 발생의 위험도가 높은 경우에는, 무언가를 자발적인 행위라고 보는 기준은 매우 높아진다. (Ibid, 118.) 해악이 수복불가능할수록, 그 행위가 허용되기 위한 요건으로 자발성 기준은 높아진다.(Ibid, 120)

 

반면에 행위자나 다른 사람의 이익에 저해가 되지 않는 행위의 경우에는 자발성의 기준은 매우 낮게 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위가 자발적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자발적인가의 질문은 허공에 떠버린 질문이 될 수 있다. 

 

어떤 사안에서 요구되는 자발성 수준은 그물망처럼 연결된 원리적 논증에 의해 고정되어야 한다.(Ibid, 121).

 

이 마지막 명제의 예를 들어보자면, 감옥에서 앞으로 장기간 계속 수감되어야 하는 사람이, 상당히 생활에 제약을 가하는 가석방 조건을 받아들이고 조기 출소하는 경우다. 구금된 상태에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속 구금한다는 위협은, 통상적인 상업적 거래의 맥락에서는 자발성을 부인하게 하는 근거(최소한 취소할 수 있는 근거인 강박)가 되지만, 이 경우는 그러하지 않다. 그래서 자발성은, 그 의사결정을 내린 여건을 일단 주어진 것으로 고정하느냐(그 사람은 가석방 제안이 아니라도 어쨌든 계속 수감되어야 했다)에 많이 달려 있으며, 이는 달리 말하면 해당 자발성 판단의 맥락에서 그 의사결정 여건의 잠정적 합법성을 전제할 수 있느냐이다.

 

비소를 뿌린 계란 후라이 문제에서 분석의 목적은, 그 계란 후라이를 입으로 가져가는 사람의 손을 탁 쳐서 못 먹게 하고, 계란을 버리게 한 다음 그것이 비소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개입이 과연 정당화되느냐의 문제다. 이 경우, 개입은, 어떤 상황에 대한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였더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바를 막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강한 의미에서 후견주의라고 할 수 없다. , 자유주의의 이론 틀 내에서 정당화되는 개입의 문제이다.

 

 반면에, 이러한 경우가 아니라 '할만한 가치 있음 판단'을 내릴 결정권을 찬탈하거나 대체하여 이루어지는 개입은 정당화되는 개입이 아니다. 그럼에도 질문의 추상수준을 조작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자발성' 흠결에 따른 개입이며 부당한 후견주의적 개입이 아니라고 외관을 꾸밀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 곤궁하여 성적 서비스를 대가를 받고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해보자.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실제로는 그 활동은 할만한 가치 없음이라는 자신의 판단을 투사하여 부과하는 것이지만, 그 주장의 외관은 진정한 자발성이 결여되었다고 꾸민다. 그러나 진정한 자발성이란 경제적으로 곤궁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하는 것이라면, 그 자발성 기준은, 여건을 잘못 고정하는 바람에 맥락에서 쓰일 수 없는 기준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좀 더 보수와 여건이 좋은 일을 능력의 부족으로 하지 못하는 모든 임금생활자들은 비자발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있어 금지시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공갈자에게 협박받아 돈을 내놓는 사람은, 그 선택지(option)의 제안자에 의해 비로소 위협이 창출되는 상황에 놓였다. 즉 그 공갈행위를 금지함으로써 폭력으로 협박받는다는 여건 자체가, 문제되는 상황에서 제거되어야 할 위협 자체이다. 반면에 다른 미숙련 직업을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곤궁에 빠진 사람은, 성적 서비스 교환의 가능성이라는 선택지를 부가함에 의해 새로이 위협을 추가로 부과받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제기되는 위협은 경제적 곤궁 그 자체이며, 그 위협을 그대로 두고 행위자가 자신의 여건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한 선택지를 목록에서 제거한다고 해서, 위협을 구성하는 여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곤궁에 빠진 사람의 직업활동을 금지하는 것을 그와 같은 의사결정 여건에 대한 해결책의 원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서 적어도 진정으로 자발적이 아니다라는 논변은, 언어를 제대로 쓰고 있지 않은 것이며, 실제로는 어떤 행위에 대한 할만한 가치 있음/없음에 대한 판단을 타인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