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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립물] 표현의 자유 개념의 게리맨더링

by 시민교육 2015. 5. 9.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표현의 자유' 개념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표현을 하도록 국가에 의하여 허락받은 상태'이다. 이러한 개념 이해에 따르면, 문제를 일으키는 표현은, 표현의 자유의 보호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상(on definition)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이해는 좌우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정치적 토론에서는 애초에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오직 수사적인 값만을 갖는다. 왜냐하면 결국 핵심은 "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표현될 수 없고,  그렇지 않은 것은 표현될 수 있다"에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에 대한 의견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 '자유' 개념은 논증 끝에서야 등장하며, 결론을 수사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또는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을 미리 수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서두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유를 한정하여 단정하는 문장에서 언급된다.

 

한편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기득 질서에 위협이 되는 것을 그들의 관점에서 배제하고 남은 영역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거나 바꾸고자 하는 급진적인 표현은 자유의 보호영역 내에 들어가지 않으며, 또한 음란 표현과 같이 지배적인 풍속에 반하는 표현도 자유의 보호영역 내에 들어가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표현의 자유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왜 들어가지 않는가? 그러한 것을 허용한다면 바람직한 체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는 논증에서 잉여적인 개념이 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새로운 질서 수립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그들의 관점에서 배제하고 남은 영역으로 정의한다. 그리하여 소수자를 경멸하거나 비하하거나, 비판하는 표현은 자유의 보호 영역 내에 들어가지 않으며, 또한 음란 표현과 같이 성평등에 반한다고 보는 표현도 자유의 보호영역 내에 들어가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표현의 자유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왜 들어가지 않는가? 그러한 것을 허용한다면 바람직한 질서 수립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는 논증에서 잉여적인 개념이 된다.

 

'자유'와 같은 일반적 범주는 상이한 포괄적 선관과 정치관을 가진 사람이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자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이 정당성을 갖게 하는 전제가 되는 규범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자유 이해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는 그러한 역할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민감하고 영향받기 쉬운 저능하고 우둔한 대중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가 하는 문제와만 관계된다. 그래서 한 측의 관점에서 일단 표현의 자유가 한정적으로 수립되면 다른 한 측의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배제된다. 그래서 이것은 공존의 범주가 아니라 전쟁의 범주가 된다.

 

그러나 롤즈가 그의 정의의 제1원칙에서 명시적으로 정립하였듯이, 자유는 오로지 자유의 전체계 강화를 위해서 제한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자유 이외의 부, 효율성, 정치적 수월성, 정치적 영향력, 사회적 파급력 등을 이유로 인해 제한될 경우에, 그것은 일부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의 궁극적인 숙고와 검토, 태도의 표명과 동조, 그리고 지식과 정보의 입수, 설득과 설득당함에 관한 결정권을 찬탈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자유는 법적 자유를 의미하며, 법적 자유는 법질서에 의하여 행위경로가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집단이 표현의 자유를 손쉽게 다르게 정의함으로써 게리맨더링해온 것은 하루이틀 일도 아니다. 문제는 이 지배를 다른 통치로 교체하고자 하는 선의를 가진 이들 역시 동일한 게리맨더링을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흔히 눈에 띄는 글들 중 하나는 "동성애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차별이자 혐오표현이며, 따라서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은 타고 나는 것이기 때문에 천성적인 것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존재를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허약한 주장이다. "소아성애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 범위에 들어가냐 마냐는, 소아성애가 유전적 소인으로 결정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할 성향이 선천적이냐는, 그 행위 자체가 허용가능한가에 관하여 독립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어떤 성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배척되어서는 안되지만, 그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 성향을 그대로 따르는 행위는 하지 말고 극복해보라는 것은 존재를 배척하는 발화가 아니다. 물론 '동성애는 옳지 않다'라는 발화는 규범적으로 부당하다. 그러나 어떤 규범적 발화를 개인이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개인 실천의 규범 차원에서 '위'인 명제를 발화한다는 이유로 그 발화가 처벌되고 규제되어야 한다는 정치도덕의 규범 차원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분리주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이야기하듯는 '남성은 선천적으로 옳지 않다'는 위인 명제 역시 그 표현 자체를 처벌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X당의 정책은 언제나 옳다'는 발화 역시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당의 정책도 항상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고기를 먹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발화는 종교적 이유로도, 또는 윤리적 이유로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고기를 좋아하는 성향 자체는 압축적으로 칼로리를 얻고자 하는 진화된 속성으로 선천적인 것이다. 그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하지 않는 쪽으로 권고하는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한 비판이 기반하고 있는 종교적 이유는 타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는 반대로 '소고기를 먹는 것은 규범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오히려 오히려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근거를 교환하면서 할 기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고, 한 쪽의 주장의 힘은 다른 쪽이 반대되는 주장을 설득력 있는 논거와 함께 제시함으로써 상쇄할 기회는 한 쪽이 어떤 주장을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표현이 타인의 자유 자체를 축소시키는 경우는, 그 표현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의 두 도덕적 능력에 더 밀접한 행위 경로를 막는 행위와 결합되는 경우다. 범죄행위의 교사와 방조, 공모, 명백 현존한 미래에의 범죄 선동(이것은 불법적인 차별을 선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재산을 사취하기 위한 사기의 발화처럼 범죄 행위 자체의 구성요건이 되는 경우, 사제폭탄을 만드는 기술적 지식과 같이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에게 타인을 폭력으로 강제할 힘을 쥐어주어 타인의 결정권을 탈취하게 만드는 도구적 정보 전파, 그리고 개인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고정시키거나 협동적 구성원으로서 교유의 선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전과사실이나 병력과 같은 정보를 폭로하는 발화와 같은 경우이다. 의견을 표명하거나, 평가를 내뱉는 것은, 그러한 발화를 한 사람 자신의 신빙성과 판단력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동조를 일으키는 것일 뿐, 타인의 그러한 두 도덕적 능력에 핵심적인 행위 경로를 막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발화의 내용을 문제삼아 발화자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자유의 축소는, 전반적인 유불리의 영향과는 같지 않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표현이 보장됨으로써, 아예 그 표현이 금지되었더라면 훨씬 더 우호적이었을 여건에 있지 않게 되는 경우는 흔히 발생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어떤 행위에 그러나 자신에게 더 우호적인 발화됨의 여건을 만들어달라는 권리는 일반적 원리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경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갖게 되는 모든 사람의 거의 모든 발화는 금지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일반적 범주로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의 발화는, 그러한 구조를 가진 표현의 자유를 권리 보장의 목록에서 과감히 배제함으로써 더 평등한 사회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에게 복합적인 인과적 연쇄에 의해 일종의 장애가 되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수 있다. 즉 헌법 교과서에서 표현의 자유의 법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학자의 발화마저도, 어떤 정치적 기획의 입장에서는 심대하게 불리한 영향을 그것도 광범위하게 미치는 발화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건의 유불리를 이유로 표현을 금지시킬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결국 어떠한 자유 옹호 표현에 대한 금지에 대해서도 논거가 될 수 있다. 

 

자유의 경계를 긋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논증의 과정에서 자유의 체계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논증은, 자유에 관한 논증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허락하고 싶은 것과 도저히 허락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심정적 태도를 여러 수사로 둔갑시키며 강조하는 것 뿐이다. 이것은 우리사회에서 시민의 입헌적 지위를 허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