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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학] 미덕과 악덕에 대한 양적 이해의 오류

by 시민교육 2021. 10. 30.

1. 논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과 악덕에 대해 설명하면서 실은 두 가지 조화되지 않는 해명을 제시했다.

 

하나는 미덕이란 그 여건에서 그 주체가 하기에 맞는 판단을 하고 감정을 느끼며 행동을 하는 안정적 성향이라는 해명이다.

다른 하나는 미덕이란 악덕의 양 극단 사이에 있는 중도를 택하는 안정적 성향이라는 해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해명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둘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다. 이 중 첫 번째 해명은 설득력이 있지만, 두 번째 해명은 틀렸다.

 

2. 미덕 개념의 전제 조건

 

윤리학의 한 분과인 미덕론에서 말하는 미덕 개념은 몇 가지 전제조건을 갖는다. 

첫째, 미덕은 이성적 존재를 전제한다. 그 적용을 위한 덕론에서 말하는 미덕이란 행위의 이유들을 살표보고 이성적 근거에 의해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주체에게 적용되는 개념이며 동시에 처음부터 규정적 내지 처방적(prescriptive) 기능을 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즉 이성적 존재가 자신의 삶을 더 잘 살도록 인도해주려는 논의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전적으로 기술하고 분류하는 차원만을 갖고서, 이성적 존재의 범위를 넘어서 이성적이지 않은 존재에까지 '덕스럽다'는 표현이 확장되는 경우도 일상에서는 종종 있지만, 그것은 원래의 의미를 확장한 은유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확장된 은유적인 의미에서 어떤 개도 덕스러울 수 있다. 개를 관찰해보면 동료 개나 심지어 인간에게도 양보를 잘 하며 또 자신의 당장의 욕구 앞에서도 훈육받은 대로 규율을 따르는 개가 있는 반면, 같이 동거하는 개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며 간식을 보면 간식을 섭취하는 것 외에는 뇌에서 모두 사라져버리는 듯이 보이는 개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에게 원래 의미의 미덕론은 필요 없다. 미덕론은 개의 삶을 바꾸는 데 아무런 규정적 기능을 할 수 없다. 개는 인간으로부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는 있지만, 스스로 미덕에 관하여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교정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개가 이렇게 다소 확장된 기술적 의미에서 덕스럽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 자신의 이성적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다. 개는 기질을 기초로 자극에 반응하는 성향을 형성할 뿐이지, 이유를 검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미덕은 행위의 유관한(relevant) 이유와 무관한 이유를 구별한다. 유관한 이유라고 함은 그 행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힘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이유다. 무관한 이유는 얼핏 이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행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힘을 실제로는 갖지 않는 부적절한 이유다. 예를 들어 강박증을 치료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할 때 치료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인가에 관한 사정은 유관한 사정이다. 만일 치료될 확률이 꽤 있다면 이는 치료 시도를 찬성하는 이유가 된다. 치료될 확률이 사실상 거의 없다면 이는 치료를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 반면에 지금 이 순간 강박적 욕구를 느낀다는 것 자체는 적어도 삶의 복지에 관하여 무제한적인 욕구충족이론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 욕구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할 무관한 이유다. 숙지된 욕구충족이론을 택하기만 하여도 강박적 욕구를 느끼는 오히려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좋은 이유가 있다. 

셋째, 미덕은 여건에 따라 그 유관성과 그 결정적 성질, 그리고 비중이 달라지는 것을 감안한다. 우선 유관성을 살펴보자.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성적 호감을 느끼고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외모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가는 하나의 유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판사이고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소송 당사자라면 그 사람의 외모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가는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결정적 성질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목이 마르다는 사실은 물을 마실 하나의 이유이다. 이는 회사에서 평소와 같이 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정수기로 가서 잠시 물 한 잔 마실 결정적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와중이라면 또는 계체 직전인 프로 선수라면 오히려 지금은 물 마시고 싶은 욕구를 참고, 지금 계획된 일을 마무리할 결정적 이유가 있다. 그러나 프리젠테이션과 계체절차를 마치는 것도 어느 여건에서나 결정적 이유에 의해 뒷받침되지는 않는데, 회사나 계체가 이루어지는 경기장에 불이나서 급히 피신해야 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중을 살펴보자. 내가 공직자로서 위험을 분배하는 사람이라면 낯선 사람 다섯 명이 죽으리라는 사실은 낯선 사람 한 명이 죽으리라는 사실보다, 비중이 큰 이유를 구성한다. 반면에 내가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 사람의 장기로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입지에 있는 외과의사라면, 내가 행위하지 않으면 다섯 명이 죽으리라는 사실은 내가 행위한다면 한 명이 죽으리라는 사실보다 비중이 크지 않다. 

즉 이유들은 구체적인 여건에서 그리고 정교하게 짜여진 규범과 가치의 망에서 어떤 자리에 가는가에 따라 달리 취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에 붙박이로 결박되어 있는, 이유로서의 유관성, 결정적임, 비중이 없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덕스러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점을 이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미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인식적 지평에서는 이해하고 있지만 의지박약이나 유혹에의 굴복 때문에 그렇게 인식한 이유를 안정적으로 따르는 성향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해명(1)과 해명(2)의 상이성

 

미덕은 인간의 규범과 가치의 지평에서, 적합한 이유들에 올바르게 꾸준히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적합한 이유들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행위나 성향을 인식적으로 모색하는 방법이, 먼저 극단적이거나 과잉된 양 지점을 식별한 다음 양적으로 그 중간에 있는 지점을 찾는 방식에 의해 확보되리라는 아무런 보증도 없다.

 

몇몇 미덕들을 이런 양적인 방식으로 그럴듯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용기는 만용과 비겁함의 중도라는 식으로, 관대함은 낭비와 인색함의 중도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해명의 대상 중 많은 사례를 어떤 방식으로 그럴듯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묘사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그 대상의 정의 특성을 규명하고 그 대상에 접근하는 타당한 방식임을 보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을 때에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묘사가, 우리가 어떤 것을 잘 모를 때에 그 잘 모르는 것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지침이 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정의 특성은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림이 대상의 모습과 들어맞는다는 우리의 감각은 보통 범형(paradigm)으로 떠올리는 예와 그 그림이 무리없이 부합하는가라는 틀에서 발동되는 직관에 의해 발생된다. 그런데 범형으로 떠올리는 예와 그림이 무리없이 부합하더라도 그 그림이 정의 특성임을 보증하지 못한다. 어떤 대상의 정의 특성이란 그 대상에서 그 특성이 없어지면 본래의 낱말을 그 대상에 적용할 수 없게 되는 특성이다. 이것은 그 개념의 내포(intension)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떤 것도 세 변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삼각형일 수 없으므로 세 변을 갖고 있다는 특성은 삼각형의 정의 특성이다. 그러나 최소한 한 변의 길이가 5센티미터인 것이 있다는 특성은 설사 그 특성을 갖추지 않아도 삼각형이 되는 것이 가능하므로 정의 특성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정치질서의 정의로움이 양 극단의 지나침 사이에 중간에 있다는 그림은 그 그림을 제시받은 사람이 범형으로 떠올리는 정치질서 결정 사안의 예와 무리없이 부합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자유를 지나치게 추구하지도 평등을 지나치게 추구하지도 않고 적절하게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는 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림은 정의(justice)의 정의 특성(defining characteristics)을 보여주지 못한다. 즉 바로 그러한 특성 때문에 어떤 것을 정의라고 칭할 수 있고 다른 것은 정의라 칭할 수 없게 되는 특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제시된 그 그림이 그럼직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자유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상황의 특정한 범례와 평등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상황의 특정한 범례를 떠올리고는 이를 쉽게 불승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가 자유라는 선과 평등이라는 선을 둘 다 중간 정도의 양으로 가지는 산술적인 방식을 통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아무도 그런 식으로 어떤 정책이나 입법의 정의로움을 판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관련된 고려사항 두 개를 적시하고 그 두 개를 양적인 척도를 나타내는 x축과 y축 사이의 사분면에 위치시키는, 하나의 틀에 억지로 맞춘 재현 방식에 불과하다. 하나의 틀에 억지로 맞춘 재현 방식으로 임의의 주제를 그려내는 것은 많은 경우에 가능하지만, 그 재현 방식이 그 주제에 대한 발전적인 사고에 도움이 되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이를테면 세계를 음과 양의 조화 문제로 보고, 수많은 대상과 현상을 음에 속하거나 양에 속하는 것으로 그려낸 다음, 음과 양의 조화가 맞지 않는 부조화 사례를 범형으로 적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부 말놀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런 묘사는 '어떤 직업을 가지면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가 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의 총량을 규정하고 총량이 넘어서면 어느 누구도 추가로 그 직업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해줄 수 있는 이성적 방도를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국가의 그런 작업은 직업의 과잉이라는 양의 넘침을 제어함으로써 직업수행의 실패라는 음의 넘침을 제어하는 조화로운 방법이라고 볼 것이고, 다른 사람은 또 나름대로 그와 반대되는 결론을 내는 음양 이론을 마음대로 주물한 말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자유를 x축으로 평등을 y축으로 표시하고는, 볼록곡선으로 무차별곡선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자유 대 평등의 문제를 묘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 자유와 평등 문제에 접근하는 발전적인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기울기가 다르며 다른 점을 통과하는 저마다의 무차별곡선을 그릴 수 있으며,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것으로 아마도 논쟁이 끝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자유와 평등을 올바르게 재현하는 방식이지도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자유와 평등은 청바지와 스파게티와 같이 어떤 상품묶음이 될 수 있는 유형적 재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용기와 만용, 비겁 어떤 심리적 성향의 과잉이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에게 닥칠 해악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와 같이 행위하는 것이 이성적인가, 그리고 그런 이성적 판단을 따를 안정적 성향을 성품의 형성을 통해 발전시켜왔는가의 문제이다. 심리적 성향의 과잉이나 부족 문제라면, 임의의 x를 기꺼이 하려는 y 수준의 심리적 성향으로 용기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x가 절도 행위라거나, 반역 행위인데 y는 다수의 의사에 반하는 진리를 발언하는 수준과 같은 10이라면 어떤가? 이 경우 y가 여전히 똑같이 10이라는 점은 전혀 중요치 않다. 절도 행위나 반역 행위를 애초에 기꺼이 하려고 했다는 점이 문제될 것이다. 그리고 10만원을 걸고 하는 도박과 100만원을 걸고 하는 도박은 전혀 다른 데 이런 도박에 임하려고 하는 안정적 수준의 y값을 중간 수준으로 갖춘다는 것도 미덕의 문제와는 무관하다. 

 

4. 결론

 

그러므로 미덕의 논의에서 해명(2)는 빠져야 한다. 미덕은 중도, 중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미덕은 그저 유관한 이유를 이성적으로 적절하게 고려하여 나온 결론에 따르는 안정적 성향일 뿐이다. 그 이외의 추가적인 은유적인 설명은 오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