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법정에 선 타노스 (2편)
[1편은 다음 링크의 글을 보세요 : 시민교육센터 :: [철학소설] 도덕의 법정에 선 타노스 (1) (tistory.com)]
“다른 전제가 무엇이오?”
“그것은 바로 친출생주의(pro-natalism)가 참이라는 전제입니다.”
재판장이 눈썹을 올렸다.
“그 전제가 어떻게 개입되어 있다는 것인지 석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검사는 기회를 얻었다는 표정을 짓고는 옷매무새를 고쳤다.
“변호인은 우주인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타노스가 나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타노스가 어떤 짓을 하건 우주인들은 멸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며 열역학 제2법칙의 적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는 가속화되는 팽창으로 인해 원자 이하의 수준에서 모두 찢겨져 버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서로 에너지 차이가 전혀 나지 않는 완전히 얼어붙은 공간들로 전락할 것이어서 어쨌거나 우주의 모든 곳에서 삶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멸종은 언젠가는 일어나며 타노스가 무엇을 하든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타노스가 멸종을 막았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제 변론의 요지는 타노스가 이른 멸종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변호인이 반론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면 타노스가 한 일이 멸종을 막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이른 멸종을 막은 것임이 드러납니다. 또한 어떠한 악을 저지르지 않고서도 이른 멸종을 막은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인구의 반을 살해함으로써 이른 멸종을 막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살해의 결과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더 많은 이성적 존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악(evil)이고 살해에 의한 죽음은 한층 더 큰 악인 반면에, 태어나지 않음은 악이 아닙니다. 타노스는 죽음이라는 악을 훨씬 더 많이 야기하고, 살해에 의한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악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저질렀습니다.”
“검사의 주장은 궤변입니다. 이른 멸종을 막는 것이 어마어마한 선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변호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말했다.
“변호인에게는 검사의 석명이 끝난 후에 필요하다면 변론의 추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우주 인구 절반을 살해하는 수단을 써서 이른 멸종을 막는 것이 어마어마한 선이라는 점이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 검사의 주장이며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재판장의 말에 변호인은 머쓱한 표정을 하고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재판장은 시선을 검사에게 돌려 말했다.
“검사의 말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배심원들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군요. 이른 죽음을 막는 것은 선(good)임은 분명합니다. 의사와 보건전문가가 치명적인 질병을 예방하는 것은 선입니다. 개별적으로 인명을 구하는 치료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보건 상태를 개선하여 많은 수의 이른 죽음을 막는 것도 선입니다. 전 세계의 파괴를 초래할 수 있는 무기가 잘못 작동할 수 있다면 그 오작동을 막는 것도 선입니다. 우주 진공 붕괴(Vacuum Decay)가 곧 일어날 것인데, 물리적 개입을 통하여 그것을 막는 것도 선입니다. 결국 우주에 사는 이성적 존재자들의 이른 멸종을 막는 것은 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요, 검사는 이 점을 부인하시는 겁니까?”
“방금 재판장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 마지막 ‘결국’ 이후의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들,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것, 치명적인 감염병을 예방하는 것, 보건 상태를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것, 무기의 오작동을 막는 것, 진공붕괴를 막는 것 모두 선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재 이미 태어나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멸을 포함하는 사태를 막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들은 주된 목적이 사람들이 더 태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방금 이야기한 행위들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더 태어나고, 세대가 이어지는 것이니, 그것도 목적에 포함되지 않는가요?”
“우리는 어떤 행위를 옳게끔 만드는 사정과 그 사정 때문에 옳은 행위를 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를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의 격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강한 진통제를 주사하면 그 환자의 수명이 줄어드는 부수적 효과가 생긴다고 할 때, 진통제를 주사하는 행위를 옳게 만드는 사정은 그렇게 하면 고통이 줄어든다는 것이지 수명이 줄어드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재판장님께서 거론하신 행위들이 옳다는 점에 논란이 없는 이유는 그 행위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사멸(死滅)을 피하는 것은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 덕택에 옳게 된 행위가 허용된다는 이유로, 그 행위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결과 자체가 그만큼이나 논란 없이 어떤 행위를 옳게 만드는 사정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된 추론입니다. 이는 고통을 누그러뜨린다는 사정 때문에 옳게 된 강한 진통제 주사 행위가 허용된다는 이유로, 그 행위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수명의 단축이라는 결과 그 자체가 논란 없이 어떤 행위를 옳게 만드는 사정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잘못된 추론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추론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되오. 그러나 세대가 지속되게 만드는 것이 그 자체로 선이라는 직관도 어쨌거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오?”
재판장이 반문하였다.
“새로운 세대의 탄생 연쇄를 이어가는 것이 그렇게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독립적인 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바로 본 검사가 친출생주의적 편향이라고 칭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물론 새로운 세대가 이어져가는 것이 좋음인 한 측면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세대의 단절로 인한 멸종은, 멸종 전 최후의 세대가 되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큰 나쁨이기 때문에, 그러한 나쁨을 막는 것은 좋음인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측면은 새로운 세대의 탄생 연쇄 지속 그 자체가 독립적인 선임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첫째로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의 좋음은 무조건적 좋음(unconditional good) 또는 단적인 좋음(good tout court)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새로운 세대의 고통과 괴로움을 대가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째로 그것은 모든 것을 고려한 좋음(good all things considered)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특정 세대가 멸종 직전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그 운명을 뒤로 미룬다고 하여도 언젠가 멸종 직전 마지막 세대는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의 창출로 인해 닥치는 것을 미뤘던 악(evil)은 결국 닥치기 마련이며 그래서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상쇄되어버리므로 추가적인 선(good)으로 결코 산정되지 못합니다. 셋째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지 않음으로 인해 현재의 세대가 입을 피해 또한,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 누리거나 겪는 것에 관한 사정이며, 이는 그것이 그 자체 고유한 독자적인 선임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음, 배심원들은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서 인생에서 여러 가지 즐거움을 누린다면 그 자체가 좋음이라고 생각할 것 같소. 그리고 그런 좋음을 누리는 세대가 어쨌거나 많을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할 것 같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대가 살 삶이 나쁨보다 좋음이 많아 순 좋음(net good)을 담는 삶인지 여부가 아니겠소. 그런데 사람들이 죽는 것이 나쁘다면, 그것은 지금 현재의 삶이 순 좋음을 담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들을 탄생하게끔 하는 것은 순 좋음을 추가로 산출하는 일이니 좋은 것이 아니겠소?”
재판장이 반문했다.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순 좋음이 있는 쪽으로 선택하라는 것은, 순 좋음을 누릴 이미 태어난 존재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타당한 주장입니다. 그런 존재가 순 좋음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위로 인하여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박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론을, 아직 태어난 존재가 없는 경우에 새로 태어나게 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대로 끌어다 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자는 순 좋음을 누리지 못하여도 박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자를 굳이 존재하게 해서 나쁨을 겪게 만든다면 그것은 해악이 됩니다.”
“이해가 되지 않소. 존재하게 된다면, 나쁨뿐만 아니라 좋음도 누리게 되는데 어찌하여 나쁨만을 고려하여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해악이 된다고 하는 것이오?”
“좋음과 나쁨을 함께 고려하는 것은, 그 둘 다 누릴 존재가 이미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되므로, 질문이 삶을 계속 지속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삶을 새로 시작할 것인가의 질문을, 그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고 계속 고정시키려면, 태어난 이후에 삶에서 누리는 좋음과 겪는 나쁨을 합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합산은 삶을 지속할 것인가의 물음에 답할 때 유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뀐 질문에 대하여 답하는 셈이 되지 않으려면, 좋음과 관련하여 태어난 경우와 태어나지 않은 경우를 비교하고, 나쁨과 관련하여 태어난 경우와 태어나지 않은 경우를 비교해야 합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오.”
“이제, 차례로 분해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좋음과 관련해서 보자면, 태어난 경우가 태어나지 않은 경우보다 더 나은 바가 없습니다. 즉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음을 누리는 것은 태어났다는 걸 전제로 하면 좋지만, 태어나지 않아서 좋음을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쁨과 관련해서 보자면, 태어난 경우는 태어나지 않은 경우보다 확실히 더 열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나쁨을 겪는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 나쁨을 겪지 않는 것보다 분명히 열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오. 특히 계속 의문이 드는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경우의 좋음과 나쁨을 합산하고, 태어난 경우의 좋음과 나쁨을 합산해서 그 각각의 합산치를 비교해야 하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 그 합산치의 구체적인 값에 따라서 열위와 우위가 정해지는 것 아니오? 왜 좋음 면에서 태어나지 않은 경우와 태어난 경우를 비교하고, 다시 나쁨 면에서 태어나지 않은 경우와 태어난 경우를 비교하는 것이오?”
“합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문제의 고유한 독특성, 즉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 개입되어 발생되는 비대칭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고로 이미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합산한다면 태어나지 않아서 아무 좋음을 누리지 않고 또한 아무 나쁨도 겪지 않는 경우가, 태어났지만 좋음과 나쁨을 정확히 같은 양으로 누려 0인 경우와 가치론적으로 동일하게 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질문을,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경우를 전제로 하고, 다시금 계속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살아가기를 중지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자녀가 2명이라고 해봅시다. 이 때 세 번째 자녀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세 번째 자녀를 낳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세 번째 자녀가 될 가능한 사람에게 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셋째를 출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셋째가 될 가능한 사람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그 사람이 또 셋째를 낳을 것인가를 결정할 때, 셋째가 될 수도 있는 가능한 사람이 셋째를 낳지 않으면 좋음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은 결코 결정의 고려사항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재판장님께서도 아이를 더 낳지 말지를 결정할 때, 아이를 낳지 않으면 실제로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가능한 사람이 좋음을 누리지 못하여 그만큼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그 점을 고려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소.”
“반면에 태어나게 될 사람이 겪게 될 해악은 분명히 고려하지요. 그 사람이 예를 들어 자주 고통스러워하는 질병을 타고날 것이라면, 그 사실은 분명히 출산을 하지 않도록 하는 쪽으로 이끄는 하나의 고려사항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병으로 고생할 존재가 실제로 태어나 그 고통을 겪는 것은 나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태어나지 않은 가능한 사람이 좋음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결정의 고려사항이 아닌 반면에, 태어날 사람이 나쁨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결정의 고려사항이 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일부 후세의 출산 결정에서 사고를 하는 방식에는 들어맞는 부분이 있는 것 같소. 예를 들어 방금 예로 든 좀 심하게 아픈 사람의 경우에 말이오.”
“그러나 그것이 그런 일부 경우에만 한정된다고 하는 것은 일관되게 사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비대칭성은, 우리 삶에서 매우 심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을 피할 의무는 있는 반면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하게 할 의무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로, 그 아이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는 이유로 대는 것은 이상하지만, 그 아이가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로 대는 것은 이상하지가 않습니다. 셋째로, 고통을 겪는 아이를 존재케 한 경우에, 그 아이를 존재케 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이치에 닿습니다. 그리고 그 후회를 그 아이를 위해 하는 것이 이치에 닿습니다. 반면에, 행복한 아이를 존재케 하지 않았을 때, 그 아이를 위해 그런 아이를 존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수는 없습니다. 넷째 우리와 먼 곳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타당하게 슬퍼합니다. 반면에 먼 곳의 무인도에 살았을지도 모르는 부재하는 행복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이 네 가지 비대칭성의 어느 것도 실천적으로 부인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비대칭성은 존재의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존재가 누릴 좋음과 나쁨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대칭성에 따라 일관되게 사고해봅시다. 태어나서 많은 불편함과 굴욕, 자기 비하, 타인의 횡포, 질병, 사고, 노화, 죽음을 겪는 삶은 매우 큰 나쁨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박탈이 되지 않는 좋음을 누리기 위해 그런 나쁨을 겪게 하는 것은 해악입니다.”
“그래도 아예 태어난 적이 없는 경우에 좋음을 누리지 못하는 것과 태어나서 좋음을 누리는 것이 가치론상 동등하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좋음과 관련해서는 태어난 쪽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겠소? 좀 더 설명을 해보시오.”
“태어난 적이 없는 경우에 만일 그 존재가 태어났더라면 누렸을 좋음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에 태어났다면 그 좋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어떤 전제 조건이 갖추어졌을 경우에는 있다면 우위가 되는 것도, 전제 조건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에는 있어도 우위가 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있단 말이오?”
“재판장님께 자매가 좋다고 사귀자고 제안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재판장님은 교제 상대방이 양 귀를 전후좌우로 손도 대지 않고 흔들 수 있는 능력에 매력을 느끼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럴 경우에 언니는 그런 능력이 없고 동생이 그런 능력이 있어도 재판장님의 교제 상대방으로서 동생이 우위를 가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언니는 성격적으로 더 매력적이고, 동생은 성격적으로 평범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분명히 동생이 귀를 전후좌우를 움직이는 능력을 더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능력을 교제 상대방이 발휘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모습을 애초에 보고자 하는 욕구나 필요가 없는 재판장님의 교제 상대방 선택에 있어, 이 능력은 합산되지 않습니다.”
“그건 이해가 되오. 그러나 태어나서 누리는 좋음은 그렇게 중립적인 성질은 아니지 않소?”
“이제 교제 상대방으로 동생을 선택하여 실제로 동생을 사귀게 되면, 귀를 전후좌우로 흔드는 능력을 보고자 하는 욕구가 일종의 중독처럼 생기고 고착되어 늘 그 모습을 보고싶어할 것임이 100% 예상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실제로 동생을 사귀고 난 후에는 그렇게 귀를 신기하게 흔드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박탈이 될 것입니다. 즉 그 상태에서는 귀를 흔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여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우위에 있습니다. 여기서 동생과 실제로 사귀는 것은, 실제로 태어난 것과 대응됩니다. 그리고 동생의 귀가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음을 누리는 것과 대응됩니다. 그런데 동생과 언니의 상대적 우위점과 열위점을 비교할 때에는, 귀를 그렇게 전후좌우로 흔드는 욕구가 생겼다는 전제조건이 성립하지 않는 시점입니다. 애초에 동생과 사귀지 않으면 그런 귀의 작렬하는 운동을 보지 못하여도 아무 박탈이 되지 않는데, 일단 사귀고 나면 그 귀의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중립적이지 않고 좋다는 점이 고려에 넣어져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되오.”
“그래서 동생의 그 귀 움직이는 능력 보유는, 동생과 실제로 사귀고 난 이후에 동생과 계속 사귈 것인가 아니면 사귀기를 중지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고려할 때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욕구가 있는데 동생과 계속 사귀지 않는다면 그 귀를 신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상당히 괴로울 테니까요. 그러나 동생과 아직 사귀었다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지 않은 비교에서는 합산될 긍정적 가치가 아닙니다. 이걸 합산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태어나야지만 좋음이 있는 경우는 좋음이 없는 경우에 비해 우위에 섭니다. 그러나 아예 태어난 적이 없는 경우라면 그 존재가 누릴 좋음이 있는 경우는 좋음이 없는 경우에 비해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을 수 있는 주장이오. 그러나 배심원들이 이 법정에서 그 주장에 완전히 납득되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 이 법정이 도덕의 법정이긴 하지만, 배심원들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서 계속해서 도덕적 논증대화를 이어갈 순 없기 때문이오. 배심원들은 평결을 내려야 하는 기일까지는 결정을 해야 하오.”
“그 점을 고려하겠습니다, 재판장님. 그러면 그러한 극히 제한된 논의조건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의 목적을 위하여, 모든 출생은 해악을 끼치는 행위라는 보편적 반출생주의는 일단 논외로 남겨두겠습니다. 대신에 제한적 반출생주의는 이 법정의 배심원 여러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논하고자 합니다.”
“제한적 반출생주의란 무엇이오? 석명하시오.”
“제한적 반출생주의란, 새로 탄생하는 존재의 삶의 질이 어떤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 존재를 탄생케 하는 것은 그르다는 이념입니다. 이 제한적 반출생주의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이런저런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좀 더 설명해보시오.”
“네. 앞서 이미 예로 든 사례인, 자주 고통을 겪을, 이를테면 평생 계속적으로 치료를 받고 침대에서 티비를 보거나 하는 등의 정신활동만 겨우 하면서 살게 될 존재를 새롭게 탄생하게 하는 것은 그른 일이라는 점은 거의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분명히 삶에서 누리는 행복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행복만으로는 그런 존재를 새롭게 탄생하게 하는 일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런 존재가 일단 태어나게 되면, 계속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점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에 노쇠와 불운한 사고로 인하여 언제라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데, 그 경우 겪는 삶의 질이 삶을 중지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질이라도 삶을 새로이 시작하지 않게 하기에는 충분히 나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새로 존재를 탄생하게 하기 위한 삶의 질의 조건은 이미 태어난 존재가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한 삶의 질의 조건보다 한층 더 엄격합니다.”
“그 점은 이해되오.”
“그런데 그런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 중 하나가 ‘그 지위가 노예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릅니다. 노예로 살아갈 사람을 탄생케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태어나게 하는 것도 그릅니다. 노예적 삶이라고 해서 꼭 삶을 중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게 될 삶이 노예적 삶이라면 그런 삶을 살게 될 존재는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을 노예로 만들 권한이 없는데, 출산을 하여 태어나는 이가 당연히 노예로서 살아갈 것이라면, 출산을 하는 것 자체가 타인을 생애 처음부터 노예로 만드는 일을 포함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인정한다고 해봅시다. 타노스의 행위와 그 논지가 무슨 상관이오?”
“타노스와 같은 인간에 의해 언제든지 삶을 박탈당해도 무방한 존재는 노예적인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우주에서 인격체들이 더 오래 존속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런 한낱 치워버려도 되는 돌멩이나 먼지 같은 존재로 대우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노스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격체들이 세대를 거듭하여 장기적으로 존속한다는 사태 그 자체이고, 그 인격체들 자체는 전적으로 타노스 같은 힘 있는 자가 설정한 그 목적을 위하여 장애가 된다면 치워버리고 수단이 된다면 한낱 수단으로 취급되어도 무방한, 아무런 존엄을 가진 권리주장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됩니다. 이는 국가의 존속 그 자체가 목적이고, 노예들은 생산력의 한 부속물로는 고려될 수 있지만 그 인격체 자체는 아무런 존엄을 가진 권리주장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타노스는 실제로 건틀릿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처분해도 되는 노예처럼 절반을 마음대로 학살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주에 인구가 과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전제에 일단 서게 되면, 이 우주의 사람들이란 나중에 언제라도 또 인구 과잉이 되면 또 절반으로 줄이기 위해 마음대로 학살되어도 되는 그런 존재로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과잉을 제거하기 위해 마음대로 학살되어도 되는 존재는 노예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타노스의 목적은 그런 노예적 존재를 더 많은 세대 동안 태어나게 하는 것이며, 이것은 제한적 반출생주의에 의해서도 정당한 목적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런 노예적 존재를 더 많이 태어나게 한다는 그릇된 목적을 위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노예처럼 취급하여 죽여버리는 것은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그릇된 것입니다.”
“방금 펼친 주장을 요약해주시오.”
“네. 본 검사의 주장은 상대적으로 강한 주장인 보편적 반출생주의에 의하면 물론이고 그보다 약한 주장인 제한적 반출생주의에 의하더라도 타노스의 행위의 목적 자체가 그르기 때문에, 그릇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멸시키는 행위는 수단이 그 선한 목적에 비추어도 비례적인가를 따질 수도 없이 그르며, 그래서 결코 영웅적인 행위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변호인이 손을 들었다.
“말하시오.”
“검사가 약한 주장이라고 한 제한적 반출생주의조차 피고인에게 유죄를 내릴 정도로 충분히 확립된 주장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사람은 태어날 자녀가 평생 아주 커다란 괴로움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정관수술과 같은 수술로 가임력을 훼손하는 것은 그르며 후세로 낳아야 한다는 것이 의무이며 그렇게 나온 사람은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노예이고 실효적인 법질서가 자신의 자식도 노예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고 하여도 노예로서 살아가는 삶도 살아가볼 만하다고 생각하며 자녀를 낳기도 합니다.”
“본 검사의 논지는 그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적인 데 좌우될 수 있는 삶의 질의 다른 측면과 달리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그르며, 노예적 삶을 동의 없이 부과하는 것도 그르다는 기준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기준입니다”
“그러나 타노스가 정말로 노예적 삶을 부과했습니까? 이번에 인구의 절반을 없앴으니, 전 우주의 인구 절반을 또 줄일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인구가 두 배로 폭발한 지구의 20세기를 참고로 해도 적어도 앞으로 두, 세 세대 정도는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두, 세 세대는 전혀 노예적 삶이 아닙니다.”
“두, 세 세대만 이야기했는데, 타노스가 다시금 인구 절반을 줄여야 하는 시점에 살고 있는 세대는 노예적 세대임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두, 세 세대가 여유가 있다는 것도 확률적인 사실상의 사정입니다. 만일 타노스의 목적을 정당하다고 본다면, 규범적으로는 그들의 삶도 노예적인 것입니다.”
“그 점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좀 더 설명해보시오. 오히려 두, 세 세대 정도는 전혀 노예적이지 않다는 변호인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배심원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 같소.”
“변호인은 규범적인 지위로서 노예적인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고 사실적인 개연성으로서 노예적인 것의 실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태어난 존재의 삶 지속에 관한 결정과 달리, 새로운 존재의 탄생 결정에서 필요조건이 되는 것은 그 지위가 규범적으로 노예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적으로는 개연성이 다소 높든 낮든 어쩄거나 어떤 사람을 규범적으로 노예적인 지위에 처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그르며, 따라서 규범적으로 노예적 지위가 결부될 수 없는 존재를 탄생케 하는 것도 그 자체로 그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법적 지위를 노예로 전락시키고 나서, 그 사람을 사실상 예전처럼 대우하기는 하지만 언제든 노예처럼 대우하여도 무방한 경우에도 그 사람의 지위는 단적으로 노예입니다.”
검사는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A 행성의 사람이 B 행성의 사람과 친구 관계를 맺은 뒤에는, B 행성의 사람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A 행성의 사람을 죽이고 그 소유 재산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고 실효적으로 집행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A 행성의 구체적인 개인과 B 행성의 구체적인 개인이 이미 친구 관계를 맺은 상태이기 때문에 인정이 있는 대부분의 경우에 B 행성의 사람이 친구를 그렇게 함부로 죽이고 재산을 강탈할 개연성은 그렇게 높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사악한 사람은 이를테면 만 명 중에 한 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A 행성의 사람은 자신과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 B 행성 사람의 노예입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교우관계에 있는 B 행성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공적 지식(public knowledge)이며, 그래서 A 행성은 오로지 B 행성의 지배 성향을 촉발하지 않는 한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A 행성의 사람이 아무리 아첨을 잘 하고 비위를 잘 맞춘다고 하여도 B 행성 사람이 도박으로 빚을 잃거나 하는 등의 오로지 자신의 사정으로 A 행성 친구의 재산이 필요로 하게 된다면, 그때 A 행성 사람은 B 행성의 자의의 처분 하에 놓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A 행성 사람이 B 행성 사람과 친구가 되었을 때에만 이 법이 적용된다고 한다면, A 행성 사람은 B 행성 사람과 친구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B 행성 사람은 A 행성 사람에게 친구되기를 청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도덕적입니다. 왜냐하면 B 행성 사람이 A 행성 사람에게 친구되기를 청하는 것은, 자신의 노예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며, 설사 자신이 노예주로서의 권한을 사실적으로 행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규범적으로 A를 노예적 지위로 끌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노스의 인구 절반 학살 이후에 살아가게 되는 첫 2, 3세대 정도는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인품이 훌륭한 B 행성 사람과 친구가 되는 A 행성 사람의 지위와 마찬가지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세대가 또 급격히 출산율이 높아져서 갑자기 인구가 많아지면 바로 그 세대부터 다시금 절반 줄이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실적으로 실제 그 노예적 지위가 방비해줄 권리도 없이 얻어맞을 수 밖에 없는 사태로의 구체적인 실행이 이루어지건 아니건 이미 규범적으로 노예입니다.”
검사는 말을 잠시 끊고 배심원을 바라보고는, 다시 말이 이었다.
“A 행성 사람이 B 행성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그런 법을 애초부터 정당하고 실효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그 법을 바꿀 수 없는 개인으로서는 서로의 행성 간에 친구로서의 교유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B 행성 사람이라면 A 행성 사람에게 친구되기를 아예 청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타노스 같은 존재에게 함부로 대량 학살을 당하여도 진지한 규범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지위에 사람들이 처하지 않도록 하는 두 가지 방법은 첫째로, 애초에 타노스 같은 존재가 더 많은 세대를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현재 사는 세대를 죽여도 된다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로 그런 원리가 마치 인정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가 있는 세계에서는 새로운 세대를 낳지 않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타노스가 자신의 목적을 정당하다고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대를 더 많이 탄생케 하는 것이 선이어야 하는데, 애초에 노예적인 규범적 지위에 있는 존재를 탄생케 하는 것은 악이지 선이 아니므로, 타노스의 행위는 결국 악을 추구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정당하지 않고, 그래서 애초에 더 큰 선을 위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검사는 규범적으로 노예적인 삶을 살게 될 존재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제처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도, 노예들은 계속해서 섹스를 하고 노예가 될 자식을 낳기도 하였으며, 또 노예 정도는 아니더라도 예속적인 삶을 살았던 독재 정부 하의 사람들도 자식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점 역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배심원들은 이 점에 관하여 각자의 독립적인 판단을 내리고 평결에 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이 변호인의 이의 취지를 일부 인정하면서 배심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좋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논의로도 이미 독립적으로 타노스의 행위가 그 자체 선이 아니라 그 자체 악을 위한 행위였다는 점을 성공적으로 확립하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와 별개의 또 다른 논지도 있습니다.”
“그 논지가 무엇이오?”
“타노스는 새로운 세대가 계속 태어나서 삶을 사는 것이 독자적인 선, 그것도 아주아주 큰 선이라고 봐야지만 정당화되는 행위를 했습니다. 즉 현 세대의 반을 살해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아주 큰 선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를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친출생주의 전제’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타노스의 변호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재판장이 발언을 허락했다.
“앞서 재판장께서 정리하셨듯이 친출생주의가 정말로 잘못된 것인지는 배심원들이 평가할 문제입니다. 아마도 검사는 배심원 여러분들의 표정을 보아 하니 그렇게 납득을 많이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검사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이라는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피고인 타노스가 무엇인가 정말로 특별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한낱 수사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전혀 심리에서 고려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의를 조건부로 인정합니다. 보편적 반출생주의 이념이 타당하다고 보는 전제에 서건 제한적 반출생주의가 타당한 근거에 서건, 친출생주의 자체가 문제라면 배심원들 중 많은 수도 친출생주의에 기반한 행위라는 잘못을 저지른 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배심원들은 친출생주의에 기반한 행위가 잘못이라는 검사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대로 배심원들이 판단한다면, 이때까지의 검사의 논구는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이에 더해 검사는 독립적인 논지라고 하면서, 타노스는 이러한 일반적인 친출생주의적 행위가 아닌 어떤 특별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을 암시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이라는 문구를 사용했으니, 이 문구를 실질적인 내용으로 정당화하지 않으면, 검사의 방금 발언은 한낱 수사적인 것으로 무시해야 한다는 점을 배심원들게 알려드립니다. 검사는 실질적 정당화를 개진하십시오.”
재판장이 말했다.
“조건부로만 인정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의가 실제로는 성공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금부터 논의하겠습니다. 간단합니다. 배심원들 중에도 아이를 낳아 기른 분들이 많겠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아이를 낳기 위한 필요조건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인 상황에서 아이를 낳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미 살아가고 있는 한 명의 사람의 살해가 아이 두 명을 새로 낳기 위한 필요조건이 실제로 된다고 하여도 살해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네 명, 천 명을 새로 낳을 수 있는 필요조건이 된다고 하여도 살해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수가 얼마이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를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지금 살아 있는 존재를 죽여야 한다고 믿는 배심원이 한 분이라도 있습니까?”
“…”
배심원들은 조용했다.
“그런데 저기 앉아 있는 피고인, 타노스는 바로 그런 일을 실행했습니다!”
검사가 타노스를 향해 손가락을 힘차게 뻗어 가리켰다.
타노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타노스 옆의 변호인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쳤다.
“타노스는 지금 곧 태어날 사람도 아니라, 먼 미래에 태어날 사람이 많아지게 하기 위해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 반이나 대량 학살했던 것입니다!”
검사는 절반을 갈라 소멸시키는 손동작을 하며 다시금 타노스를 가리켰다.
“이 점에서 타노스의 친출생주의적 행위는 통상적인 것이 아니라, 도저히 정당화될 수조차 없는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타노스의 행위가 통상적이지 않은 것은, 타노스가 막고자 했던 악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타노스는 터무니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노스가 구하려고 했던 생명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변호인이 양팔을 활짝 펴며 외쳤다.
“변호인은 현재 ‘구하려고 했던’(try to save)이라는 말을 원래 의미와 다르게 씀으로써 배심원들을 혼동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구한다’(save)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거나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박탈당하는(deprived) 상황을 피하게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는 뜻으로 씁니다. 그런데 변호인은 이 말을 아무것도 박탈당할 처지에 없던 사람들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출산계획을 세우고 새로 아이를 낳는 것은 어떤 아이를 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없던 존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래서 가임기간에 열 명의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던 커플이 한 명만 낳는다고 하더라도, 9명을 구하지 않고 사멸에 처하도록 방치하였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질 수도 있었던 그 9명은 가상적인 관념에 불과한 것으로, 아무런 박탈도 겪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9명을 새로 낳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미 태어난 아이 한 명을 살해하는 행위를 두고, 9명을 구하기 위해 부득이 1 명을 희생하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출산을 위하여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이미 살아 가고 있던 존재를 죽인 것입니다. 타노스의 행위는 정확히도 이와 같은 행위와 같은 구조를 가진 행위이며, 그것도 그 불법의 규모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행위입니다.”
변호인은 이번에는 제대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검사는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면서 또 다른 포문을 열었다.
“타노스는 통상 비례의 원칙의 세 번째 부분원칙으로 이야기되는, 피해의 최소성을 어겼습니다. 즉, 해당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권리를 덜 제한할 수 있는 수단을 두고 굳이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수단을 택한 것입니다.”
“자세히 설명해보시오.”
“타노스가 차고 있던 건틀릿은 그 힘을 발휘하는 방법이 인구 절반 죽이기로 협소하게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의 범위에 닿는 한, 건틀릿을 장착하고 있는 자는 원하는 사태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구 절반이 아니라 타노스 일당만 죽기 같은 사태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타노스가 스스로 자살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까? 타노스는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자신이 죽는 절반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이미 각오하였습니다!”
변호인이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호인이 너무 자주 튀어올라 저의 논고를 끊습니다. 주의를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변호인, 말부터 하지 말고, 먼저 이의를 개진할 수 있는 신청을 하시오.”
“알겠습니다, 재판장님!”
변호인이 기가 살짝 죽어서 자리에 앉았다.
“타노스는 정말이지, 살아 있는 세대의 출산력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 점에서도 타노스가 재생산에 다소 환장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구 과잉이 정말 문제이고, 곧바로 인구를 줄여야 한다면, 전 우주의 사람들의 가임력을 2분의 1, 또는 급하면 4분의 1로 갑자기 떨어뜨림으로써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임력이 줄어드는 기간을 설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커플당 예전에 태어나던 새로운 세대가 절반, 4분의 1로 줄어들게 되고, 노령인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사멸하므로 인구는 금방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절반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사태는 절반의 가임력을 없애는 사태보다 훨씬 더 큰 사태 변경이므로, 더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더 작은 에너지만으로 인구 과잉의 해결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더욱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데가가, 이 방법을 택하면 그 누구도 비자발적으로 사멸당하지 않기 때문에, 해당 목적을 위한 권리 제한은 훨씬 덜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노스는 가임력은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페티쉬같은 개인적인 집착, 개인 선호와 취향 때문에, 인구의 절반을 한꺼번에 살해해버리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검사의 말에 변호인은 멍하게 되었다.
“피고인 타노스에게 묻습니다. 피고인이 건틀릿을 가지고 전 우주의 인구의 가임력을 일정 세대 동안 2분의 1이나 4분의 1로 줄이는 것도 가능했습니까?”
재판장이 타노스에게 물었다.
“네.”
타노스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했습니까?”
재판장이 타노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타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가 법정의 문을 열었다.
"변호사님!"
타노스를 변호하고 있던 변호인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반가움에 외쳤다.
방금 들어온 사람은, 타노스의 공동 변호인으로 타협 없는 불굴의 변호를 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2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