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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립물] 행위의 구성적 전제로서의 자유와 그 함의

by 시민교육 2021. 1. 20.

한낱 움직임 또는 움직임에 그치지 않는 많은 인간의 행위는 자유를 그 구성적 전제로 요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란 이유를 검토하여 선택하거나 수정하거나 그만둘 수 있는 신체와 정신의 움직임 또는 움직이지 않음이다. 심장의 박동은 행위가 아니다. 갈증남도 행위가 아니다. 눈썹이 자연스레 떨어짐도 행위가 아니다. 무릎을 치면 다리를 올리는 반사작용도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 정책을 채택하고 시행하는 것,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것은 행위이다. 

 

어떤 행위가 이유를 검토하여 선택하거나 수정하거나 그만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한낱 일련의 몸짓과 정신적 사건들의 연쇄에 불과하다. 관처럼 생긴 고문도구에 들어가 암흑 속에서 꼼짝없이 구속되어 있다면 전혀 움직이지 않음이라는 물리적 사건이 계속 이어질 것이며 가려움과 고통스러움이라는 정신적 사건도 계속 이어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위한 것이 아니며 그저 강제당한 상태에 불과하다. 

 

이로부터 신체와 정신의 움직임 또는 움직이지 않음의 특정 경로를 강제당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행위라는 것이 가능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종교적 금식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대기근 때문에 누구도 식량을 구하지 못하고 이미 십수일 전부터 전혀 먹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종교적 금식기간이 시작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금식기간 동안 아무 음식도 먹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종교적 금식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음식을 먹지 못함이라는 강제된 상태가 금식기간과 우연히 겹쳤을 뿐이다. 이 때 어차피 그 종교를 믿고 있으므로, 굶주리게 되어서 차라리 잘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기분을 좋게 하는 말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 상황을 종교적 금식 행위를 하고 있는 상황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학문탐구는 증거들과 논변들을 검토하여 이에 따라 결론을 취하고 표현할 자유가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국가가 어떤 주제에 관하여 지정한 사실에 어긋나는 것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하는 법률이 실효적일 때, 그 사회의 학자는 그 주제에 관하여 학문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활동과 비슷한 외양을 취하면서 강제된 것에 부합하는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지정된 결론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단순히 역사에 관한 어떤 정보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사실이 참이기 때문에 믿고 거짓이기 때문에 믿지 않도록 하기 위한 행위는, 관련된 자료와 주장이 모두 제시되어 그것들을 자유롭게 말하고 접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떠한 명목으로도 역사적 사실을 국가가 고정하고 그 고정된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것은 처벌의 위협을 통해 말하거나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적어도 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서는 구성원들이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믿고 거짓이기 떄문에 믿지 않도록 하기 위한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재판에 있어서 어떤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이라고 확립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헌법 규정을 구현한 형사절차조항-유일한 자백, 전문법칙을 위반한 전문증거, 위법수집증거-에 어긋나지 않는 한 사실조사의 방법에 의거하여 제시될 수 있는 모든 사실이 모두 공방 과정에서 제시되고 조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 규범적으로 바람직하다는 법리를 증거법칙으로 밀어넣거나 그렇게 바람직한 것으로 선언된 사실과 어긋나는 증거조사는 일정 범위에서 시행해서는 안된다는 절차적 규정으로 밀어넣는 것은, 더 이상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이라고 확립하는 활동으로서의 재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그런 재판의 외양만을 빌어 거짓 권위를 주장코자 하는 일종의 쇼와 비슷한 것으로 전락한다. 

 

행위의 경로를 훼손하는 것은 행위의 구성적 요소를 지워버리는 것이며, 그래서 진지한 의미에서의 그 행위를 온전한 의미에서는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합리성의 관점에서나 합당성의 관점에서나 그른 일이다. 

 

이는 이렇게 진지한 의미의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가 그런 규제를 지지하는 특정 시점의 자기 자아가 견지하는 것들을 특권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권화는 두 가지를 전제하는 데 하나는 규제를 도입하는 현재 시점의 자기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것들이 그를 수가 없다는 전제에 선다. 다른 하나는 규제를 도입하는  시점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진지한 행위를 막을 그런 인식론적/실천적인 특권적 지위에 불평등하게 있다는 전제에 선다. 

 

첫째로 합리성의 관점에서 인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오로지 진지한 행위가 있을 때에야,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창작의 행위가 없으면 자신이 어떤 작품을 창작했다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사실을 조사하고 주장들을 교환하는 행위가 없으면 어떤 것이 근거들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참이라고 믿는다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자유롭게 정책에 대해서 논의하는 행위가 없으면 어떤 정책이 바람직하고 부작용이 없기 때문에 그 정책을 지지하게 되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인간에게 행위 없이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이 드는 것은, 그 특정 시점 이전에 행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특정 시점 이후의 행위가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 특정 시점 이후에서의 결과는 진지한 의미에서 획득불가능한 것이 된다는 결론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둘째로 합당성의 관점에서 특정 시점의 권력을 쥔 인간도 자신에게 주어진 동등한 인생을 추구할 자격만을 가질 뿐이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대신 도맡아서 할 자격을 갖지 못한다. 주체의 친구가 특정 시점에 직업선택의 자유를 법률적으로 대신 행사해줄 권한이 있는 사회에서, 그 주체는 자아실현으로서 또는 소명의 실천으로서 직업수행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직업과 관련한 삶을 주체의 친구가 많은 부분 대신 살고 있는 것인데, 물론 그런 대신한 결정으로 인해 생기는 비용의 대부분은 주체에게 귀속되고 친구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에 있는 구성원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결과이다. 친구도 그럴진대, 일면식도 없는 권력을 쥔 세력이 그런 불평등하고 부자유한 지위를 강요할 권한이 있다는 전제에서 서는 진지한 행위 불가능하게 만들기는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부당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