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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번역] 자넷 래드클리프 리처드, "유인을 받아 한 동의: 신체 기관과 신체 서비스 사안"

by 시민교육 2022. 5. 16.

자넷레드클리프리처드_유인을받아한동의_신체기관과서비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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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영국 철학자 자넷 래드클리프 리처드의 논문으로, 다루는 주된 문제는 다음과 같은 조건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것(예를 들어 신장 기증)이 통상적으로는 개인이 결정할 범위 내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개인의 동의가 다른 사람들에 의한 적합한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도 하고 충분조건이기도 하다고 보지만, 그 행위에 대한 대가지급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외과의는 신장이식수술에 대가지급이 개입되어 있으면 그 수술을 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 구별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저자는 주된 소재로 신장판매 사안을 다룹니다. 쉬운 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장을 그냥 대가 없이 기증하는 것은 기증하는 당사자가 동의만 하면 허용된다. 그런데 왜 신장을 대가를 받고 주는 것은 주는 당사자가 동의를 해도 불허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이 물음은 보다 일반적인 것입니다. 즉 신체를 사용하는 서비스나 신체 일부를 주는 것과 같이, 대가지급이 개입되지 않았을 때에는 개인의 동의가 다른 사람들이 그 동의한 행위를 하는 것의 허용성의 (제3자의 권리 침해가 없다면) 필요충분조건인 그런 행위가 대가지급이 개입되었다는 차이에 의해서만 금지되어야 할 행위가 된다고 보는 것과 같은 구별이 정당화되는지, 정당화된다면 어떤 근거에서 정당화되는지입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답은 그러한 구별은 정당화되지 않으며, 정당화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규제 없는 신장 매매를 지지하는 것이 결코 아님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된 관심은 위와 같은 조건문을 포함하는 물음에 대하여 '불허된다. 왜냐하면~'의 정당화 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입니다.) 

 

이 논문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정당화 시도의 논지는 '그러한 사안에서 개인의 동의에 흠결이 있어 그 동의는 무효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정당화 시도는 일반적으로 동의는 해당 사안에서 요구되는 의사결정능력, 자발성, 관련 정보의 숙지의 어떤 최소한도의 요건을 갖추어야 유효하다고 발상에 착안합니다. 그래서 위 구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이와 같은 각 요건의 흠결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자넷 래드클리프 리처드는 어느 요건 면에서 보아도 그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해당 행위가 수반하는 위험과 관련된 의사결정능력 부족 때문에 그 동의가 무효라고 보는 주장은, 신장을 이식용으로 떼어내는 사태 자체에 수반하는 해악이나 위험과 관련된 의사결정능력이 장기를 파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족하다는 주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나 심지어 낯선 이에게 신장을 기증하는 행위를 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사결정능력 부족이 없다고 본다는 점과 어긋납니다. 그리고 신장 기증에 비해 신장 판매는 유상의 이득을 더 얻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추가적인 위험이 없습니다. 만일 추가적인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장 판매가 불법화됨으로 인해 암시장에서 수술이 이루어짐으로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 추가적인 위험을 발생시키는 여건을 불법화의 근거로 쓰는 것은, 오로지 불법화 때문에 생긴 결과를 다시금 불법화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쓰는 것이어서 노골적인 순환논증이 됩니다. 

 

둘째로, 자발성에 흠결이 있다는 주장은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은 자발성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금 두 가지 내용으로 주장될 수 있습니다.

우선, 신장을 상실하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는 않기 때문에 동의가 진정으로 자발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거래상의 동의에는 그 자체로 떼어놓고 보면 원치 않는 요소가 있는 것이며, 그래서 원치 않는 요소(이를테면 공짜로 물건을 얻지 못하고 돈을 줘야 한다는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자발성이 훼손되어 동의가 무효라고 본다면, 모든 계약이 다 무효가 될 것입니다. 애초에 거래란 원치 않는 요소가 있는 것에 동의하게 하기 위하여 원하는 요소를 추가하는 제안을 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을 정도로 충분히 좋은 제안은 자발적인 것일 수 없다는 관념을 전제로 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에게는 큰 금액의 액수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자발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안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받아들일 만한 유인이 없는 경우에만 자발적이라는 터무니없는 결과를 함의합니다. 이는 원래의 상태(제안을 받지 않은 상태)에 비해 거의 무차별할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에 대한 동의만이 자발적이고 유효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노동을 싫어해서 일하지 않고 돈을 벌지도 않는 상태에 비해 노동을 하면서 돈을 버는 상태가 무차별하려면 최소한 급여가 월 300만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봅시다. 즉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여가의 가치가 300만원이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월 300만원의 급여를 주는 근로계약은 자발적이지만 월 400만원의 급여를 주는 근로계약은 비자발적이어서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어떤 물건을 마음에 들어해서 이 정도면 싼 가격이라 구매를 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은 거래일수록,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저자는 유인을 부가함으로써 매력적인 선택지가 더 늘어나게 하는 것이 결코 여하한 의미에서 자발성 훼손이 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논지를 확립합니다. 

자발성 훼손 논변의 두 번째 형태는 '빈곤에 의한 강제' 논변입니다. 빈곤에 의한 강제 논변은 강제성이 제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빈곤이라는 배경 자체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지가 좁아서 매우 나쁜 선택지만이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하는 동의는 자발성이 훼손된 동의로서 무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지의 좁음은 동의를 무효로 만드는 사정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죽음이냐 아니면 매우 힘든 과정의 항암치료냐의 두 선택지만 있다고 하여, 두 번째 선택지에 동의하는 환자의 동의가 비자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견주의적인 관점에서도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약된 여건에 의해 내재적으로 바라지 않는 선택을 하도록 강제되는 것을 우려한다면, 당신은 그들의 상황을 그들의 선택지들 중 최선의 것을 제거하고 그보다 한층 더 바라지 않는 선택지들만을 남겨둠으로써 개선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강제에 의해 무효화되는 동의의 패러다임 사안들은, 강제를 가하는 사람이 피해자들이 취하기를 바라는 선택지가 남은 선택지들 중 최선의 것이 될 때까지 피해자들의 선택지를 고의로 축소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신장 판매의 제안은 선택지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고, 그렇게 새롭게 늘어난 선택지가 최선의 선택지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논변에 의해 취하게 되는 결론은 오히려 그 자체가 강제에 의해 동의가 무효화되는 패러다임과 일치합니다. 사회정책에 의해 빈곤을 제거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신장 판매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더 매력적인 선택지가 생길 때까지 선택지들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판매 금지는 그 자체로는 선택지들의 빈약한 범위를 한층 더 좁히도록 선택지를 닫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빈곤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는 신장 판매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그럴듯해보이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선택지를 증가시키고 처지를 낫게 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와는 정반대 방향의 것으로 선택지를 제거하고 처지를 더 한층 더 나쁘게 하는 것이므로, 최선과 차선의 관계에 결코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넷 래드클리프 리처드는 이러한 사고가 다음 두 가지를 혼동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의사결정능력이 문턱을 넘어섰는지 살펴보는, 동의자의 정신적 상태(의 어떤 면들)를 평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람의 여건에 얼마나 많은 제약이 있는지 살펴보고는 유효한 동의의 문턱에 도달하는 것으로 간주할 만큼 충분한 자유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이며 첫 번째는 유효한 동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의사결정능력의 문턱 충족을 살펴보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두 번째는 항암치료의 경우를 살펴보았듯이 그런 과정이 아닙니다.

 

셋째, 관련 정보의 숙지 요건면입니다. 저자는 "적정한 정보라는 관념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 두 해석은 각각 매우 상이한 종류의 가능한 불평을 뒷받침한다. 하나의 해석에 의하면 이 요건에 관한 질문은, 어떤 사람이 (이상적으로) 얼마나 많이 알아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해석에 의하면 이 요건에 관한 질문은 동의를 얻는 사람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이 알려주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고 짚습니다. 이 중 첫 번째 해석은 부당하고 두 번째 해석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이 둘은 환원불가능하게 서로 다르다. 당신은 어떤 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해줄 의무가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당신의 동의를 받는 사람이 이를테면 어떤 새로운 약품의 효과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줬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그것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 명백히 당신은 어느 누구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 동의할 수 있다탐사되지 않은 장소로 가는 탐험대에 참여하기, 혁신적인 수술에 동의하기 등등 말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종류의 위험을 취하는 것을 막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동의의 유효성 이외의 어떤 근거에 기초하여 그렇게 막는 것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 유관한 문제는, 동의자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동의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어야 했는가이다." 따라서 알려주어야 하는 바를 다 고지 받았다면, 적정한 정보 요건은 갖추어진 것이고, 이러한 해석에 의하여 그 요건이 갖추어졌다면, 설사 그것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도 개인들은 그들이 감수하기를 원하는 위험에 관하여 결정할 자격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사안에 관하여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동의가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은 바로 그 자격을 부인하는 것임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만일 신장 한 쪽을 떼어내는 수술이 수반하는 위험은 신장 기증자에게나 신장 판매자에게나 마찬가지로 고지될 수 있으며, 정보 요건에 있어서의 차이는 이론상 생겨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그 차이가 생겨난다면, 이는 신장 판매를 불법화함으로써 암시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실제상의 차이를 논거로 드는 것은 다시금 자신의 정책이 만들어내는 결함을 이유로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와 같이 정당화 시도가 모두 실패한다는 점을 밝힌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직관은 강하게 남는 이유가 무엇인지 해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후보들 몇몇을 기각합니다. 이를테면 탐욕이 문제라는 지적은, 살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투여하려고 하는 사람은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각합니다. 다음으로 진화적으로 신체 장기를 떼어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신장 무상 기증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각합니다. 신장을 판매하는 사람의 목적이 이타적이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신장부전인 딸을 위해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백혈병에 걸린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는 유일한 수단이 자신의 신장을 판매하는 것인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 행위를 금지한다는 점에서 기각합니다. 신장 기증자와 피기증자의 개인적으로 특별한 연고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낯선 이에 대한 신장 기증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각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신체를 팔 정도로 필사적인 처지에 누군가 빠져 있는 모습이 비하적이라고 여기며, 그래서 그런 비하적인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역겨움의 감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장기를 판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개인적으로 역겨우며,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장기 판매를 금지하고 싶어하는 것이오와 같은 어떤 것을 말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며, 그 경우 금지는 그 감수성이 그토록 불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침해된 바로 그 사람의 이득을 위해 이미 몹시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더 나쁘게 만드는 대가를 치르고서 주창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본 논문은 해당 논문이 다루고 있는 특정 쟁점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동의의 유효성 문제에 관하여도 많은 시사를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보통 어떤 활동의 관련 당사자들의 동의에 불구하고 그 활동을 금지하고자 할 때, 동의의 흠결을 만연히 수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방식의 논의는 비생산적이며 동의이론 전체와도 정합성을 갖지 않음을 본 논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