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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베라 베르겔손 "해악에 대한 동의"

by 시민교육 2022. 7. 1.

해악에대한동의_베라베르겔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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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논문은 해악에 대한 동의가 구성요건을 조각시키는 경우(A)와 위법성을 조각시키는 경우(B-1), 그리고 아무것도 조각시켜주지 않고 그대로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B-2)가 어떻게 나뉘는지 구별 기준과 그 기준에 대한 이론적 해명을 시도한 논문입니다. 

 

논문의 구별에 따르면 구성요건을 조각시키는 사안(A)인 강간, 납치, 절도 사안에서는, "행위 그 자체는 금지 규범을 위반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는 것, 누군가를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가져가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동의의 부재 때문에만 나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 법률을 어떻게 기초하건 상관없이, 절도, 강간, 납치의 경우에 있어서는 동의의 부재로 인해 구성요건에 해당성하게 된다. 즉 비동의가 범죄의 정의의 일부이다."라는 점을 짚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반면에 합의에 의한 섹스나 소유권의 합의에 의한 변경에는 아무런 유감스러운 점이 없다."고 합니다.

 

반면에 두 번째 집합인 고통 야기하기, 상해, 사망(B)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은 유형의 행위라는 특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감스러운 것이다. 유감스러운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은 나쁘며 피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방위와 같은 꼭 필요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죽이기, 다치게 하기라는 행위 그 자체를 금지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공격자를 죽이는 것이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죽이기를 책 빌리기와 같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유감스러운 것이다. 치과 환자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치과의사가 그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그 본질적인 부당성을 잃거나 줄이려면, 죽이기나 다치게 하기는 정당화를 요한다. 여기서 동의의 역할은 그와 같이 도덕적으로 비중립적인 행위가 최종적으로 죄가 되지 않게 하는 항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항변사유로서만 기능한다."

 

그러면서 조지 플레처의 <형사법을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Criminal Law)의 지적을 인용합니다. "금지규범이란 '정합적인 도덕적 명령을 진술하기에 충분한 수의 요소들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죽이기나 고통 가하기의 경우, 이 명령은 꽤나 직설적이다: 죽이지 마라, 그리고 고통을 가하지 마라. 그러나 강간, 절도, 재물손괴에 대해 우리는 공동체에 어떤 행동 규칙을 전하기를 바라는가? 섹스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가져가지 마라?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부수지 마라?"

 

이와 같은 구별 기준 및 그 근거는 상당히 납득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B 유형의 행위 중에서 피해자의 동의가 있어 위법성이 조각되는 경우(B-1)와 피해자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는 경우(B-2)는 어떻게 구별될까요?

 

다음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위법성조각사유 항변의 기초(피해자의 유효한 동의)
2. 객관적으로 선호될 만한 결과 (해악과 악보다 더 큰 선); 그리고 
3. 피해자의 동의를 주관적으로 알고 있고 선호될 만한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피해자를 다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을 것" 

 

그런데 저자는 2에서 '해악과 악보다 더 큰 선'인지 여부를 결정할 때에는 권리 침해의 해악과 악 뿐만 아니라 인간 존엄 모욕의 해악과 악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인간 존엄의 모든 위반이 형사처벌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중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 그렇다고 하면서, 과잉범죄화를 막으면서도 동의에 기초한 인간 존엄 위반을 형사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처벌의 기초가 되는 "형사적 해악은 중요한 복지 이익에 대한 부당한 저해라는 그 현재의 의미를 유지해야 하지만, “부당한”은 (1) 피해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 또는 (2) 피해자의 존엄을 위반하는 것 둘 중 어느 하나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요약하자면, 동의 항변사유의 두 번째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가해자는, 자신이 피해자의 복지 이익을 저해하고 동시에 피해자의 존엄을 무시하였음에도(즉 범죄적 해악을 야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로운 행위가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저자는 "동의 항변에 대한 제안된 개념화는 두 가지 규범적 결과를 낳는다. 하나는 동의만으로는 피해자의 죽음이나 상해의 위법성을 조각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의가, 적어도 해악의 한 측면, 즉 권리의 침해 측면은 파기하기 때문에, 언제나 적어도 부분적인 항변사유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분적인 위법성조각은 부당한 행위를 옳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그 행위를 다른 면에서 똑같지만 합의에 의하지 않은 행위와 비교하여 덜 부당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라고 합니다. 

 

역자의 견해로는, 구성요건 조각사유와 위법성 조각사유에 대한 구별 논의는 타당합니다. 또한 동의가 있는 경우 위법성 조각사유(항변사유)의 일반적 구조에 대한 해명도 그럼직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형사적 해악에 '존엄 위반'을 포함한 것은 인간 존엄 개념의 목적론적 왜곡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 존엄은 권리 주체로서의 인간의 지위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며 그 지위에서 개인주의적 정당화가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을 넘어서는 의의를 갖지 못합니다. 물론 개별적 정당화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의를 갖는다는 것이 많은 관할권에서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인간 존엄을 사회가 유지되는 것을 바라는 인간의 이미지(image) 유지의 이해관심으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 결과 저자는 과잉범죄화를 막고자 하였고, 새도매저키즘적 행위를 당사자의 동의에 불구하고 일률적으로 처벌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구별을 흐려 처벌가능한 범위에 속하도록 개념을 이해할 수도 있는 형태의 정식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목적론적이고 강한 후견주의적인 관심이 형법이라는 자유 제한의 가장 극심한 형태로 잠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권리 주체인 개인의 도덕적 지위와 무관한 일반적인 인간 상의 유지에 인간 존엄의 원리가 관련된다고 하는 이해를 버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가 인간 존엄 위반이라는 '부당행위' 내지 '범법행위'의 독자적인 범주를 필요로 했던 이유로 들었던 범죄들은 (1) 아예 규제 자체가 부당하거나 (2) 행정적 제재로 충분히 목적 달성이 가능하거나 (3) 아니면 규제는 정당화되지만 그것은 동의가 규범적 변환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거나 셋 중 하나로 해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노예제의 경우에는 (3)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동의가 규범적 변환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런 동의를 유효하게 집행하도록 하는 법질서가 자유의 전체계의 유지, 복구, 강화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노예계약을 당사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행하는 법질서는 자유의 전체계의 악화를 관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증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에서 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