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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책소개] <헌법의 기초>

by 시민교육 2023. 2. 14.
저와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원 책임연구관인 최규환 박사님이 함께 쓴 <헌법의 기초>가 출간되었습니다. 서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문>

헌법은 정치공동체를 규율하는 근본 법규범이다. 따라서 헌법은 그 밖의 모든 법규범의 정당성과 효력의 원천이 된다. 국가 행위의 근거가 되는 법률, 명령, 규칙은 헌법에 근거를 두지 않거나 어긋나는 경우 법규범으로서 정당성과 효력에 흠결을 갖게 된다. 국민 각자는 과거의 어떤 사람들이 법이라는 명목으로 말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받게 될 제재의 사실적인 위협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법규범으로서 정당성과 효력을 갖기 때문에 준수할 이유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헌법의 제‧개정과 해석은 바로 그러한 이유를 줄 수 있는 요건을 준수하여야 한다.
이 몇 안 되는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이미 헌법과 관련된 구성원의 과업을 잘못 이해하는 오관념(誤觀念)을 가진 채 헌법학에 입문하곤 한다. 가장 흔한 예는 헌법이 근본 법규범이라는 말을 그저 헌법이 실정법 중 최고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실정법의 위계에 관한 언급으로 전적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법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적으로 제정되고 집행되는 폐쇄적 체계에 불과하며, 헌법이란 그저 그런 체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규칙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오해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 그리고 정치권력의 조직과 행사에 관한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두 가지 태도 중 어느 한쪽으로 흐르기 쉽다. 하나는 수사적으로는 헌법에 호소하고 마치 헌법을 있는 그대로 단지 기계적으로 적용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구체적인 사안에서 결론을 좌우하는 부분은 자신의 호오(好惡)에 유리한 직관과 자유연상에 두지만 이를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헌법에 관하여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여 자신이 헌신하는 정치적 신조와 프로그램을 위하여 언제든 유리한 대로 의식적으로 그 내용을 주물(鑄物)할 수 있다고 보고 단지 다른 사람들의 설득을 위해서 마치 있는 그대로의 헌법을 적용하는 외양만 취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전개되는 방향은 상반되지만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다. 그 뿌리란 법규범으로서의 정당성과 효력의 문제가 바로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면서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층위의 기준으로 해결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미 지고의 선과 진리를 다 파악했다고 자부하는 착각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에 관하여 사람마다 무수히 상이한 관념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그것 중 많은 것이 그저 그 하나의 삶에서 모두 실현할 수 없다는 사소한 의미에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심원한 차원에서 크게 충돌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집단, 자신이 지지하는 당파만이 옳다고 여기는 철저히 자기본위적인 관점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무엇이 궁극적인 공동의 번영인가에 대해 진지하고 신실한 다툼이 자주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심원하게 충돌하는 좋은 삶에 대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대규모의 복잡한 분업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공동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공공의 사업을 추진하고 조정하는 일은, 각자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내세운 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법의 명목으로 이를 관철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와 행동으로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삶을 향도하는 기준과 정치공동체를 규율하는 기준을 동일시하면서 각자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곳에서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누구나 힘만 있다면 자신이 좋다고 생각한 바에 따라 다른 사람도 살게 하도록 강제할 것이므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 수 있는지 아닌지라는 실존의 가장 중차대한 문제가 언제나 통치조직의 정치권력을 누가 현실적으로 획득하는가에 완전히 좌우될 것이다. 보편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이익이 어떻게든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좋은 것이라고 주장되거나 이익을 얻기 위한 부담이 불공정하게 지워지는 것이 공정하다고 주장되어도 그런 주장을 정말로 공동의 번영을 위한 주장과 구별할 방도가 없을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데 유리한 모든 수단이 제약 없이 동원될 것이다.
진지한 다원주의가 성립하는 세계에서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가 이토록 까다롭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동의(同意)라는 의사작용에 눈을 돌릴 것이다. 그런 시선은 어떤 것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핵심 근거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의사작용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법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지키기로 하면서 제정했기 때문에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법의 정당성과 효력은 법의 내용이 아니라 의사작용의 사실적 계보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미성년의 상태를 벗어나 스스로의 이해력에 따라 세계를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현실의 국가 행위가 하나같이 모든 국민의 실제 동의를 얻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대부분의 국민의 실제 동의를 얻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동의의 문제는 다시 은밀히 설정된 의사결정정족수(상대다수, 과반수, 가중다수)를 충족하는가의 문제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나 정족수의 충족이 만장일치의 동의가 아님은 분명하므로, 이는 정확히 원래 출발점이었던 문제로 돌아온 것이다. 소정의 의사정족수를 충족하는 세력을 형성하는 이들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강제되는 것이 어떻게 정당한가의 문제 말이다. 법치가 어떤 문턱을 넘는 세력을 충족하는 이들의 자의를 규칙의 형태로 집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면 이렇게 문제를 바꾸어서는 안된다.
헌법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들이 진지한 수범의무를 지도록 만드는 정당성을 낳으며 모든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과 공익의 추구에 적합한 권력행사와 의사결정의 공유된 틀에 관한 규범이다. 따라서 헌법의 제‧개정과 해석에 관한 논의는 그러한 공유된 틀로서의 자격과 요건에 관한 논의와 떼어낼 수 없다. 헌법의 세부사항과 내용에 대한 학습은 바로 그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준수의무를 지우는 규범으로서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신비화하는 설명으로 빠지지 않고, 헌법이 애초에 근본 법규범으로 서 갖는 성격에 대한 이해와 헌법의 개별 문언에 대한 이해가 괴리되거나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이 교과서는 헌법의 개념, 전문과 총강, 국가형태, 기본원리, 제도, 기본권의 체계와 구제를 설명하는, 헌법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를 위한 헌법 개론서이다. 개별 기본권과 통치기구에 관한 내용은 『통치의 기본구조』와 『기본권의 기초이론』에서 다루도록 한다. 다만 헌법의 전체 모습을 개괄하면서도 필요한 곳에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면서도 입문자의 길을 잃게 만드는 신비화하는 서술을 최대한 피하여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이 근본 법규범으로서 헌법의 성격과 시종일관 정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다.
학문이란 주제가 된 진리를 규명하는 데 적합한 체계적 방법을 따라 이루어지는 이성적 활동이다. 헌법학은 헌법에 관한 진리를 규명하는 데 적합한 체계적 탐구이다. 그러나 헌법에 관한 진리는 실천적 진리이다. 단지 ‘이다’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야 한다’, ‘해야 한다’까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살필 당위의 개인적 지침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 권리와 의무의 할당, 이득과 부담의 배분을 결정하는 기본구조에 관련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접근할 때 많은 오관념을 들여오기 쉬우며 게다가 그 중대성 때문에 그 오관념을 고집하고자 하는 유혹도 크다. 헌법을 배울 때에는 그 이전에 세간에서 알게 모르게 습득했던 관념―상충하는 직감과 자유연상과 수사적 주물에 취약한 관념―은 일단 내려놓고, 법의 정신과 원리에 따라 사고를 건축해나가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부터 정확하게 이해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소 어려움을 겪더라도 헌법학적 사고의 빌딩 블록을 갖추어나간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갖고 법규범에 관한 실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체계적 방법을 알아나가는 데 초점을 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