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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 입헌민주적 사고란 무엇인가?

by 시민교육 2024. 6. 14.

연세대학교 교양교육연구소의 시민 대상 교양강좌에서 강의했던 강의록입니다. 

 

입헌민주적 사고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입헌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치와 관련하여 사고할 때 준수해야 하는 지침을 규명하겠다. 

1.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답인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이 모든 국가권력 행사의 필요조건임을 유념한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형태의 사고를 따른다고 하자. ‘내가 바라는 바람직한 사회는 S상태의 사회이다. S상태의 사회로 가기 위해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세력을 이루어 그러한 상태를 실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또는 ‘나는 X라는 목적이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X라는 목적을 추구하는 데는 p가 매우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X라는 목적이 중요하고 가치 있고, 그것의 달성에 p가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이 다수를 이루어 p를 실행한다면 이것은 정당하다.’ 이러한 사고가 놓치기 쉬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인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이 모든 국가권력 행사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무시하기 쉽다는 것이다. 

(1)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이란 “각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인 개인들에 대하여, 그 개인이 구체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법을 강제적 권력을 통해 집행하는 것이 어떤 조건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질문이다. 
이 질문은 국가 내에서 국가권력 하에서 살아가며 국가권력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만일 이 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이 설정하는 조건을 어기면서 국가권력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정당하건 정당하지 아니하건 상관하지 않으며 그저 압도적인 무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신념을 관철하고자 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사고한다면, 국가권력을 둘러싼 구성원들은 일종의 총성 없는 내전 상태에 임하는 적대적인 분파의 일원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은 책략을 사용하여 자신이 바라는 바를 무슨 수를 쓰든지 달성하고자 하고, 사회구성원들을 동등한 존엄과 가치를 가진 존재로 대우하지 아니한다. 

(2)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정치권력은 … 모든 시민이 합당하고 합리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원리 및 이상에 비추어 지지할 것이 기대될 수 있는 기본사항을 가진 헌법에 따라 행사될 경우에 [자유롭고 평등한 다른 사람들에게] 정당화될 수 있다.”(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bia University Press, 1966), 217.)라는 롤즈의 언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답이 타당한 이유는 규범의 발령자와 수령자 누구나 각각 근본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면 규범을 발령할 수도 없고 수령할 수도 없으며, 단지 한낱 사실적 힘을 부과하고 사실적 힘을 어쩔 수 없이 또는 타산적으로 부과받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면 규범 발령과 수령이 유효하게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예는 노예의 경우이다. 노예에 대하여 발령하는 노예주의 명령은 준수의무를 낳는 유효한 규범이 아니며,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노예는 노예주의 명령의 정당성을 승인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못하므로 그 규범의 진지한 수령자가 될 수 없다.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구현하는 기본사항을 가진 헌법을 정치 공동체의 기본적인 과제, 즉 다기한 포괄적인 선관을 가지며 때때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조건을 수립한다. 그러한 기본 조건에 어긋나는 억압이나 불공정한 이익의 향유나 배제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법을 통한 국가권력의 행사는 규범적 힘을 갖지 못하는 한낱 사실적 힘의 부과에 그친다. 

따라서 서두에 예로 든 사람은 S상태나 X 목적이 바람직하고 가치 있으며 중요하다는 확신을 관철하기 전에, 그것이 다원적인 가치관을 가진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들이 억압 없이 공유하는 목적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도모하는 수단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들에 의하여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을 위한 기본 조건에 합치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2. 윤리, 도덕, 정치도덕, 구조적 정치도덕을 구별하고, 상위 층위의 당위가 하위 층위의 당위를 제약함을 이해한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라면 W의 방식으로 살아야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Y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나쁘고 경멸할 만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W의 방식으로 살면 족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W의 방식으로 살아야 할 가치를 가진 존재이고, 그렇지 않으면 삶을 낭비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내가 W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만큼, 다른 모든 사람도 W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가치 있다. 따라서 도덕이란 누구든지 W의 방식으로 살게끔 타인을 대우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제도는 W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살도록 인도하거나 제재하거나 강제하는 것을 궁극적인, 그렇지는 않아도 중대한 목적으로 마땅히 삼아야 한다.’ 

이 사람의 사고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식의 사고는,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준수하기 위하여는 당위의 층위들을 구별하고, 상위 층위가 하위 층위의 당위에 따른 삶을 살 자유를 구성원들에게 동등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제약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입헌민주적 사고는 당위에 관한 논의의 네 층위의 구별을 이해하고,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규정하는 가장 높은 층위들의 당위에 관한 타당한 결론이 그 아래 층위의 당위에 관한 실천을 제약한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당위에 관한 논의의 층위는 네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윤리, 도덕, 정치도덕, 구조적 정치도덕이 그것이다. 
첫 번째 층위인 윤리(ethic)는 좋은 삶을 살려면 해야 하는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윤리의 층위는 대단히 포괄적이며 그에 관한 실천적 숙고는 어떤 보편법칙으로 확립될 수 없다. 
두 번째 층위인 개인적 도덕(personal morality)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다른 개인에게 서로 지고 있는 의무에 관한 것이다. 내가 당신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당신의 발을 밟아서는 안 된다, 내 쾌락을 위해 당신의 돈을 훔쳐서는 안 된다와 같은 것이 개인적 도덕 층위의 당위이다. 
세 번째 층위인 정치도덕(political morality)은 구체적‧개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강제로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제도를 매개로 하여 다른 사람들과 맺는 정당한 관계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 층위인 구조적 정치적 도덕(structual political morality)은 정치도덕의 층위에서 정당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와 결정과정의 조건과 틀을 정당하게 설립하고 유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어떤 법률을 입법하는 것이 그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입법을 반대하는 사상과 의견을 발표하고 전파해야 한다는 것은 개인적 도덕 층위의 당위이다. 나쁘고 어리석은 법률은 입법하지 않아야 하고 좋고 현명한 법률은 입법해야 한다는 것은 정치도덕 층위의 당위이다. 어떤 법률안이 결국 법률로 공포되었고 그것이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것이라면 그 법률이 어리석은 것일지라도 그 법률은 유효한 법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은 구조적 정치도덕 층위의 당위이다.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것이 아니라면 그 법률은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것도 구조적 정치도덕 층위의 당위이다. 자신이 반대하는 입법에 찬성하는 사람의 사상과 의견의 전파가 결국 그 입법의 제정에 기여할 것임이 분명하더라도 그 사람의 언론‧출판의 자유를 법적으로 박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구조적 정치도덕 층위의 당위이다. 
당위 논의의 구별되는 층위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관계, 즉 비이행적 관계(non-transition relation or non carry-over relation)와 제약 관계(constraint relation)가 성립한다. 
비이행적 관계란 한 층위의 당위가 다른 층위의 당위로 그대로 이전되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윤리적으로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이 올바르고 좋은 삶이라고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명시적 의사를 무시하고 그 종교를 믿을 때에만 좋다고 생각하는 사태를 그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즉 윤리 층위의 당위가 도덕 층위의 당위로 그대로 이전되지 않는다. 친구와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 나쁘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약속 어기는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법률을 도입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즉 도덕 층위의 당위가 정치도덕 층위의 당위로 그대로 이전되지 않는다. 어떤 법률의 제정을 찬성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개인적 도덕의 당위로 타당하다고 해서, 그런 법률이 제정되지도 않았는데도 마치 그런 법률이 제정된 것처럼 공권력을 집행하고 국민을 대우한다면 죄형법정주의를 비롯한 정치도덕적 당위와 민주주의를 비롯한 구조적 정치도덕적 당위에 어긋난다.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다고 하더라도―예를 들어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알아보지 않고서 함부로 주장하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국가가 주장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고 거짓을 주장하는 것을 제재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은 구조적 정치도덕에 어긋난다. 정치도덕적 당위도 구조적 정치도덕적 당위로 그대로 이전되지 않는다. 어떤 법률이 필요하고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 법률이 폐기되지 않는 국민들의 마음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그 법률이 정당하다는 것을 강변하는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거나 그 법률을 비판하는 표현을 금지하는 정책이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어떤 법률이 분명히 위헌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결정까지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법률이 사실은 합헌이며 헌법재판소가 틀렸다는 의견의 발표와 전파를 금지하는 것은 구조적 정치도덕적 당위에 어긋난다. 그러나 ‘그 법률이 합헌이다’라는 주장이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해서, 그 주장을 비판하지 않을 의무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제약관계란 하위 층위의 당위는 상위 층위의 당위에 의해 그 형태와 내용이 제약된다는 것을 말한다. 상위 층위는 하위 층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위 층위에 관한 숙고와 실천의 구성적 조건이 된다. 옳은 입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거나 반대하는 사상과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구조적 정치도덕에 어긋나는 정치도덕적 명제를 관철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박탈은 애초에 정치공동체에서 법이라는 것이 규범적 자격을 갖기 위한 조건을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도덕 명제는 구조적 정치도덕에 어긋나서는 타당할 수 없다. 도덕 명제는 정치도덕 명제에 어긋난다면 타당할 수 없다. 좋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윤리적 명제는 적어도 (사람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엄격한 영역의 도덕 명제에 어긋난다면 타당할 수 없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준수하는 사회의 법률과 그 하위의 규범은 주로 정치도덕 층위의 당위를 규율하고, 헌법규범은 핵심적인 정치도덕적 층위의 당위와 함께 구조적 정치도덕 층위의 당위를 함께 규율한다. (물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준수하지 않는 사회의 법령은 윤리적 층위의 당위를 법적으로 규율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고 또한 이러한 법령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합당한 제도적 통로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규율은 법의 준수를 근거짓는 개인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규범적 지위를 훼손하면서 동시에 그 법을 준수하라고 명하므로 수행적 모순을 낳는다.) 헌법규범은 하위 층위의 당위에 근거한 행위가 정당하기 위한 가능조건을 규정한다. 따라서 하위 층위의 당위에 관한 견해가 얼마나 타당해보이며 강력해보이건 간에, 그러한 타당성에 관한 판단을 스스로 형성하고 그에 따르는 삶의 가능조건을 파괴하는 것은 입헌민주주의적 사고가 아니다. 
앞서 서두에 예로 든 사고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념에 빠진 사람은 이 층위들을 거꾸로 세운다. 그들은 좋은 삶에 대하여 갖는 강렬한 확신에서부터 시작하여 도덕을 주형하고, 다시 이 개인적 도덕을 그대로 정치도덕과 구조적 정치도덕에 이전한다. 이들의 사고에 비추어보면, 자신이 부당하거나 거짓이라고 의심치 않아하는 사회‧정치‧경제‧문화‧역사에 관한 주장을 금지하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불이익을 국가권력이나 사회권력을 통하여 부과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자기중심적 관념은 현대 대원주의 사회에서 입헌민주국가의 근본적 과제를 도출하게 된,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해야 한다’는 당위를 표현하는 문구를 즐겨 쓰면서도, 그 문구가 원래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가능조건을 파괴하는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정당성의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의 입헌민주적 사고는 정치도덕의 핵심과 구조적 정치도덕이 헌법규범으로 구현되어 있을 때, 이것이 그 이하 층위에 있어서 자신의 행위를 제약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즉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구현하는 헌법규범과, 그 헌법규범에 합치하는 법률이 동등하게 열어둔 자유의 공간 안에서 각자 살아가는 질서가 확립되고, 각자는 그 안에서 자신이 마땅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핵심적 정치도덕과 구조적 정치도덕의 원리들 중 대표적인 것이 법치주의원리와 사회국가원리이다.
법치주의원리란 국민의 권리‧의무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써 정하여야 하고 그러한 법률은 법의 최소한의 일반적 형식을 준수하여야 하며, 그 법률의 목적과 내용 또한 기본권 보장의 헌법이념―인간의 존엄성 존중, 자유와 평등―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이념이다. (참고: 법치주의원리는 헌법에서 한편으로는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을 제한할 때 준수해야 하는 기본권 제한원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권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원칙으로 구현된다. 기본권 제한원칙으로 구현된 법치주의원칙에는 법률우위원칙, 법률유보원칙, 포괄위임입법금지원칙, 적법절차원칙, 명확성원칙, 소급입법금지원칙, 신뢰보호원칙, 자기책임원칙, 과잉금지원칙, 과소보호금지원칙, 본질적 내용침해금지원칙, 평등원칙 등이 있다. 통치권의 조직에 있어서 법치주의의 구현으로는 행정법치주의와 사법적 통제, 위헌법률심판과 헌법소원심판제도, 사법절차적 기본권 보장과 권리구제의 제도화, 성문‧경성헌법을 통한 헌법의 우위 확보, 권력분립원칙 등이 있다.)
사회국가원리는 인간존엄에 상응하는 인간다운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물적 토대를 보장하는 물질적 급부와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의 기능을 유지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규제와 조정을 하는 국가의 책무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법치주의 원리와 사회국가원리를 구현하는 여러 자유와 권리, 제도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해석하고 적용할 때에는, 단순히 자유연상에 의하거나 관행에 의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법치주의 원리를 국민 다수가 선출한 의회의 다수가 제정한 법률를 강제집행하는 것은 민주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식의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고는 애초에 법치주의 원리와 사회국가원리가 당위의 층위를 구별하는 전제에서, 정당성의 가능조건의 핵심을 이루는 정치도덕과 구조적 정치도덕의 원리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최고원리에 의해 지도되는 구성원들의 관계를 보장하는 것으로 헌법규범의 이해한다. 즉 목적론적 이해를 피하고 의무론적으로 기본권규범을 이해한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써, 정당성이라는 가치를 헌법이 도모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헌법은 법치주의원리와 사회국가원리에 따른 여러 가지 규정들을 담고 있다. 그 규정들은 정말로 중요한 가치들을 도모한다. 일반적으로 무죄추정원칙을 위반하는 재판이나 명확성 원칙을 위반하는 법률에 의한 처벌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어떤 가치도 그 하나만이 중요할 수 없으며 절대적일 수 없다. 따라서 무죄추정원칙이나 명확성 원칙이 추구하는 가치도 다른 가치와 비교하여 그 비중이 가늠되어야 한다. 그래서 문제되는 범죄가 심각하고 억제할 필요성이 클 때에는 무죄추정원칙이나 명확성 원칙은 적어도 종합적인 가치를 가장 잘 도모하도록 문제되는 범죄적 행위를 제대로 억제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이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고가 놓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사고는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서, 다시금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형해화하고 파괴하는 것을 무방하다고 여기는 원래의 사고로 돌아가면서도 스스로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준수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는 법치주의원리과 사회국가원리를 구현하는 규범들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지도원리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하고, 따라서 의무론적 제약을 어기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유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복수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들의 관계에서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 것을 틀지우는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구성하는 헌법규범을, 잘 지키면 지킬수록 전체 가치의 지도에서 일부를 차지하는 가치상의 점수를 그만큼 올리는 가치의 하나로 잘못 생각하는 목적론적 착각에 빠진다.  
“헌법 제10조에서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헌법이념의 핵심으로, 국가는 헌법에 규정된 개별적 기본권을 비롯하여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자유와 권리까지도 이를 보장하여야 하며, 이를 통하여 개별 국민이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확보하여야 한다는 헌법의 기본원리를 선언한 조항이다. 따라서 자유와 권리의 보장은 1차적으로 헌법상 개별적 기본권 규정을 매개로 이루어지지만, 기본권 제한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거나 기본권 형성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요한 보장조차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한다면, 헌법 제10조에서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위반된다고 할 것이다.”(헌재 2000. 6. 1. 98헌마216)라는 헌법재판소의 설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권 규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확보하기 위한 내용으로, 즉 의무론적 제약 규범으로 읽어야 한다. 기본권은, 인간을 한낱 총가치나 조화로운 가치 상을 확보하기 위해 산입되는 구성부분으로 보는 목적론적 이해에 입각한 가치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확보하기 위한 내용으로 기본권 규정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는 구성원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일생에 걸친 공정한 협동체계로서의 사회의 동등한 참여자로서의 기본적 능력을 가진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기본적 능력은 바로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의 능력이라는 두 도덕적 능력이다. “정의감은 사회협동의 공정한 조건을 특징짓는 공적 정의관을 이해‧적용하고 그에 근거하여 행위하는 능력이다. … 선관의 능력은 자신의 합리적 이득이나 선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 수정하며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 그들이 협동의 공정한 조건으로서 원리와 규준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준수하리라는 보증이 있으면 기꺼이 준수하고자 할 경우 … 사람들은 합당하다. … 합리적인 것은 … 이와는 별개의 이념이며 … 특유하게 자기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 판단과 숙고를 할 능력을 지닌 [행위자에게] 적용된다.”(John Rawls, Ibid., pp.13-14.) 이러한 능력을 훼손당하는 존재, 각자 개별성을 가지고 그런 능력의 개발과 보존을 보장받지 못하는 존재는, 공정한 협동체계로서의 사회에서 서로 규범을 발령하고 수령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예로 든 사람과 같은 사고는 그러한 개별 존재의 두 도덕적 능력의 훼손을 어떤 가치의 도모를 위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두 도덕적 능력의 개발과 보존을 위한 전제조건을 훼손하는 주장으로서 규범을 수령자로서의 지위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면서 규범을 수령할 것을 명하는 것으로서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 
목적론적 논의는 이러한 수행적 모순을 보이지 않게 한다. ‘우리’로 이미 융합되어 개별성이 사라진 1인칭의 관점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좋은 가치를 도모하는 입장으로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목적론이란 행위의 궁극적 이유는 사태(또는 결과로서의 사태와 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행위 자체)에 담기는 어떤 가치를 최대화하거나 가치들의 마땅한 균형과 조화의 모습을 달성하는 데 있을 뿐이며 따라서 이러한 가치의 총량이나 조화로운 상에 의거해 해명할 수 없는 행위의 옳음과 그름의 이유는 없다고 보는 이론이다. 공리주의나 완전주의가 바로 이러한 이론이다. 
반면에 의무론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별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지위 관계는, 그 관계를 훼손하게 되는 행위가 목적론적으로 사태를 보았을 때 더 나은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제약 규범을 구성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애초에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이 가장 우선적인 진지한 질문이라고 받아들인 이상, 그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게 하는 사고방식인 목적론적 사고방식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서두에서 예로 든 사람은 규범과 가치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헌법규범을 사실은 어기고 있음에도 자신은 헌법규범이 도모하는 가치를 여전히 추구하므로 헌법규범을 준수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행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상이한 속성을 갖는 이유 유형으로 가치와 규범을 이론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규범은 그것을 승인할 상위의 지위 관계를 전제한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규범 논증은 독특한 형식을 갖는다. 즉 규범 논증은 복수의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주체의 지위 관계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하는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제안된 법적 결론이 위배하는가를 살피는 검사를 필수적으로 포함하게 된다. 반면에 가치에 관한 논의는 (확장된) 1인칭 관점에서 추가로 보유하는 것이 더 나은 대상들에 대한 맥락적 판단들을 산출하며, 여기에는 관계 위반의 검사가 내재해 있지 않다. 
기본권 문제 해결에서 규범 논거는 가치 논거에 대하여 우선성을 갖는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음이 논증되는 가치는, 기본권 규범의 우선성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합리성 기준에 의거해 규범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가치에 관한 판단이 합리성에 따른 논증에 의거하여 규범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넘어서 규범을 뒤집는 것은 기본권 규범의 존재 이유에 반한다. 기본권규범을 해석‧적용하는 것은 기본권규범이 표현하는 관계를 준수하는 것이지 그 관계를 어기면서 그 기본권규범이 도모한다고 생각되는 종합적 가치의 상태를 잘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예로 든 사람의 사고는 규범을 가치 추구의 제약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상태에 맞추어 거꾸로 그 내용을 주형하여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부지불식간에 파괴한다. 무죄추정원칙과 명확성원칙이 위반되고 있다면, 애초에 형사처벌이 정당하기 위한 가능조건이 무너진 것이다. 그것이 설사 범죄의 억제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무죄를 추정받지 못하거나 불명확한 법률에 의해 처벌되는 바로 그 개별인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위배하였고, 그 개별 사람 또는 그와 유사한 처지에 빠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불운하고 떨어진 사실적 힘의 부과로 전락한다. 

4. 주권의 행사를 의사작용의 다수결적 관철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에서 참여하는 일반의사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제도적 장을 계속 유지하고 그 의사소통의 제도적 장에서 심의하고 내린 결론이 국가의 권력행사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도록 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사고한다. 
‘최근에 어떤 심각하게 나쁜 행위가 기소되었지만 결국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사가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보았다. 이런 심각하게 나쁜 행위를 처벌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나를 비롯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다. 판사의 이러한 판결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기술이 발전되면 모든 판사를 인공지능(AI)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국민 다수가 선거를 통해 부여한 민주적 권력인 의회가 제정한 어떤 법률을 나를 비롯해 다수 국민이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이것이 헌법규범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는 선출되지 않은 비민주적 권력인 헌법재판소가 민주적 권력 위에 선 것으로서 국민주권의 관점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제도는 폐지되거나, 아니면 국민투표를 통해 뒤집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어떤 정책에 대한 지지가 과반수이다. 그런데 그 정책을 의회는 입법하지 않고 있다. 의회가 주권자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린 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사고는 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주권자란 그 어떤 내용으로든 그 의사대로 국가권력을 행사하더라도 정당할 수 있게 만드는 본질적 속성을 갖춘 자이고, 주권 행사란 그런 본질적 속성을 갖춘 자의 의사의 표명에 의한 국가권력의 행사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수결이 민주주의로서 정당하다는 잘못된 사고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권(主權; sovereignty)이란 대내적으로 국가의사를 전반적‧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최고의 권력이자 대외적으로 독립의 권력을 의미한다고 설명된다. 그래서 이러한 설명과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바로 국민이 국가의사를 전반적‧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다수결의 진행이 바로 주권행사라는 발상이다. 
그러나 애초에 주권이 한낱 사실적 힘이 아니라 규범적 정당성을 갖춘 힘이 되기 위해서 그 권력은 구성원이 공정하게 협동하고 평화롭고 공존하기 위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중재자와 입법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자격이 한낱 사실적인 의사의 표명과 그 의사가 다수임에 의해 충족될 수는 없다. 국민주권론에서 말하는 전체로서의 국민은 개별 국민도, 통치권을 행사하는 국가기관을 현실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개별 국민의 다수도 아니다. 따라서 개
별 국민의 의사를 집계하여 가장 많은 수가 원하는 바대로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주권의 행사와 등치되지 않는다. 주권자인 국민은 헌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 구성되는 권력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단순한 의사의 표시를 통해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국민투표는 헌법에서 정한 의제(헌법개정이나 중요 국가정책)에 대하여 한정된 역할을 갖는 것이며, 모든 사안에 있어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더라면 다수 의사로 집계될 바가 주권의 의사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또한 선출된 대표도 주권자의 의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에 의해 조직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대표의 권력 남용과 자의적 행사를 억제하기 위한 권력분립제도를 택한다. 그 결과 위헌법률심사제와 같이 다수결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권리 침해 등을 제약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다수 입법을 위헌으로 본 위헌법률심판에서 내린 판단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다수결에 따른 결론을 강제로 집행하기 위한 정당성의 조건 그리고 그 조건에 어긋나는 국가 행위를 무효로 한 것이다. 즉 그런 심판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복구한 것이지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정치권력의 규범적 토대, 즉 법규범의 힘의 원천이 모종의 속성을 갖춘 주체의 실제 의사작용에서 전적으로 나온다고 보는 이해는,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무시한다. 그런 이해에 따르면, 권력의 정당성은 어떤 속성을 가진 주체와 그 주체의 의사작용을 파악하는 작업을 통해 결정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행위가 정당함’이 ‘어떤 행위를 하든 정당한 것이 되도록 하는 속성을 지닌 주체에 의해 행해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행위의 정당함은, 그것이 완전히 공허한 개념이 되지 않으려면 그 행위를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여부와는 논리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뛰어난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예외적인 여건 때문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실제로 했다면 그 행위는 부당한 것이 되지 그 사람이 그 전까지 덕성 높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정당한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정적 권위 중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내린 명령조차도 그것이 정치도덕에 위반된다면 그 명령은 결국 규범적 힘을 갖지 못한다. 행위의 정당성은 행위를 조정하는 규범에 의해 설정되는 관련된 사람들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판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주권이 최고의 권력이라면 그 최고의 권력으로서의 규범적 자격은, 권력의 형성이나 행사에 있어서나 규범적 요건을 갖추어야만 성립하는 것이고 그 규범적 요건에는 구성원들의 지위와 관계에 대한 존중이 빠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설사 충분한 수의 구성원들에 의해 습관적 복종을 받는 사람이 임의로 어떤 사람을 처형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사실적으로 압도적인 힘의 행사일 수는 있어도 주권의 행사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을 마치 주권자의 속성을 갖춘 사람이 보유한 모종의 실체적인 힘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규범을 혼동한 것이다. 현상적으로 압도적인 사실적인 힘의 행사라고 하여도 어떤 제약, 틀, 질서를 준수하지 않으면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 모든 개인이 진지한 수범의무를 가진 규범을 발령하려면, 그 행사의 내용과 방식에 있어서 정치적 정당성을 갖추어야 한다. 즉, 그 내용은 보편적인 권리보장과 공동의 이익 추구에 관련된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이 적정한 절차에 의하여야 한다. 그와 같은 보편적 권리보장과 공동의 이익 추구의 관점에서 이성적인 근거를 가진 것으로 적정한 절차를 거쳐 합의되는 의사를 일반의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적정한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거나 그 구성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분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의사는 일반의사가 아니다. 공동의 이익은 보편적 보장 형식으로 추구될 수 있는 이익을 말하고, 분파적 이익이란 그러한 보장 형식을 가질 수 없는 개인적 특성에 종속적인 이익이다. 예를 들어 비슷한 기여 능력이 있음에도 공공재 생산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그 공공재를 향유하는 지위만 확보하는 무임승차의 이익은, 보편적 보장 형식으로 추구될 수 없는 이익이므로 분파적 이익이다. 설사 무임승차를 하게 될 사람이 다수라고 하여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것은 총체로서의 국민의 의사작용 그 자체가 최고의 규범적 힘을 가진다는 것도 아니고, 개개인이 의사표출한 것을 집계하여 다수로 판정된 의사가 최고의 규범적 힘을 가진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개별 국민이국가의 권력행사와 관련된 합리적 의사소통의 제도적 장, 즉 평화로운 공존 및 공동의 번영과 공정한 협동을 위해 국가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여 일반의사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제도적 장을 계속 유지하고 그에 참여할 자유롭고 평등한 기본적 지위를 가지며, 바로 그러한 의사소통의 제도적 장에서 심의하고 내린 결론이 국가의 권력행사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할 지위를 가진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주권 행사는 개인 각자가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음에 의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정당성의 요건을 가진 합리적 의사소통의 제도적 통로 자체를 훼손되지 않은 채로 유지하면서, 그리고 그 제도적 통로를 통해서 판단을 매듭짓고 실행하는 전체 과정에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5. 입헌민주주의 구성원으로서 심의에의 참여는 개별 사안별로 명제의 참과 거짓을 확립하는 원리에 의거한 논증으로 의사소통에 기여하는 것을 우선적 내용으로 하는 것임을 유념한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X 정책으로 이익을 본다. 나처럼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다수의 선호를 반영하는 것이 민주주이다. 그러므로 X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X 정책을 반대하는 정당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당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투표이다. 투표를 잘 해야 나라의 미래가 밝다. 그런데 A당은 나쁜 당이고 B당은 좋은 당이다. 따라서 좋은 당인 B당이 추진하는 정책은 좋은 정책이다. 게다가 B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B당이 추진하는 정책에 설사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결함보다 장점을 내세워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B당에 찬동하도록 하는 것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민주주의의 구성원으로서 할 일이다. 그리고 평소에 나의 민주주의의 기여는 언제나 A당은 나쁜 당이고 B당은 좋은 당이라는 점을 늘 꾸준히 주장해서 다음 선거에서 B당이 보다 많은 표를 얻게 하는 것을 우선적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사고에서 잘못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을 유념한 상태에서 주권의 행사가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의 조건을 강화‧유지하고 일반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작동하는 의사소통의 제도적 장에 심의적 기여를 하는 것을 중요한 요소로 하므로, 심의적 기여를 위해 준수해야 하는 지침을 지켜야 하는데, 이 지침을 망각하였다는 것이다. 
민주적 심의는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무엇인지, 그것을 강화‧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수이든 소수이든 분파적 이익이 아니라 일반이익이 무엇인지 그것을 효과적으로 도모하면서도 부작용이나 헌법규범 위반이 없는 방안은 무엇인지는 모두 어떤 명제의 참‧거짓을 확립하는 논증대화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명제의 참‧거짓을 확립하는 과정이 왜곡없이 잘 진행되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예로 든 사람은 명제의 참‧거짓의 확립과 명제태도의 일치의 확보를 혼동하고,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명제태도의 일치를 얻어내는 것이 민주적 토론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구별이 필요하다. 
먼저 명제와 명제태도의 구별하여야 한다. 
명제(命題; proposition)는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진술로 표현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영철이가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진술된 명제는, 영철이가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철이가 오늘 회사에 실제로 출근하지 않았다면 이 명제는 참이다. 영철이가 오늘 회사에 출근하였다면 이 명제는 거짓이다.
명제태도(命題態度; propositional attitude)는 어떤 명제에 대한 주체의 태도이다. 즉 어떤 명제의 참 또는 거짓을 믿거나, 희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바라는 것이다. 
명제와 명제태도는 진리조건이 다르다. 진리조건이란 진술로 표현된 것이 참이 되기 위해 성립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영철이가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라는 진술이 참이 되는 것은, 영철이가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태가 실제로 존립하는 경우 오직 그 경우이다. 반면에 ‘영철이는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라고 영희가 믿는다’라는 진술의 참은, 영철이가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건 출근했건, 출근하지 않았다고 영희가 믿는 경우 오직 그 경우이다. 
명제태도가 어떠하건 그것은 명제의 참‧거짓과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설사 거짓인 명제를 다수가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명제가 참이 되지 않는다. 다수 국민이 거짓인 명제가 참이라는 명제태도를 갖고 그러한 명제태도를 전제로 국가권력을 행사할 경우 그것은 일반이익에 해가 될 것이다. 
그 다음 해야 할 구별은 논증과 설득의 구별이다.  
논증(論證)은 명제의 참·거짓을 논거들의 결합을 통해 보여 주려는 언어적 활동이다. 논증의 목표는 진리의 발견 또는 확립이다. 설득(說得)은 말을 사용하여 상대방이 나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언어적 활동이다. 설득의 목표는 믿음의 일치이다.
설득은 인간 실천에서 중요한 현상이다. 어떤 명제가 정말로 참이라면 그 명제를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은 좋다. 따라서 타당한 논증의 표현이 설득력까지 뛰어나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만일 부당한 논증이라면 그 표현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설득력이 뛰어나다면 이는 오히려 해가 되는 일이다. 
심의에 기여하는 진리에 다가가는 사고는 명제의 참·거짓을 판단할 때 그 주제와 유관한 사항인 논거만을 고려한다. 그 주제와 무관한 소망이나 선호, 그 사회나 소속된 당파의 지배적 의견, 자신의 이해관계 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설득에 마음이 앞서는 사람은 바로 이 지침을 어기기 쉽다. 그런 사람의 목적은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이 크고 작은 불이익을 입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배제 당할까 두려워할수록 더욱 잘 달성된다. 언어의 조작과 거짓 통계로 사람들의 정보 환경이 오염될수록 더 잘 실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압력과 환경은 비인식적 이유들을 구성한다. 비인식적 이유는 명제의 참, 거짓과 무관한 이유이다. 특정 질병과 관련하여 국가가 공표한 내용과 어긋나는 내용을 주장하면 처벌받는다는 것, 어떤 행위가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 낙인 찍히고 비난받는다는 것이 비인식적 이유의 한 예이다. 인식적 이유는 명제의 참, 거짓과 유관한 이유이다. 특정 질병과 관련하여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제시되는 근거, 행위의 금지와 허용을 결정하는 규범적 추론에 따라 제시되는 근거가 인식적 이유의 한 예이다. 
설득의 실패는 청중이 자기자신과 일치된 명제태도를 갖게 하지 못하였다는 데서 온다. 반면에 논증의 실패는,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에 적합한 논거들을 들어 그 결론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거나, 그 주제에 적합한 논거를 가진 이의를 성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하였다는 데서 온다. 
자신이 반대하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을 비하하고, 수치를 주고, 경멸을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노골적이든 은밀하게든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은 설득의 전략으로서는 자주 채택되는 것일 수는 있지만 논증으로서 심의의 과정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해가 된다. 
입헌민주적 사고는 설득에 주안점을 둔 표현에 의해 영향 받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힘이 있는 쪽과 일치하는 사고를 획득할까를 고민하는 방법에 의해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그런 방법을 따르는 사람은 심의의 과정을 왜곡시키는 힘을 더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면서도 자신이 주권을 적절하게 행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주제별로, 하나하나 떼어서, 그 주제와 관련된 제약사항들을 준수하고 적합한 논거들을 들어 그 결론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일응 타당한 이의를 성공적으로 처리하는 활동에 기여할 수 있을 때 그러한 기여를 하고, 이런 기여의 과정을 왜곡하는 힘에 하나를 더 보태지 않는 것이 입헌민주주의 사고의 중요한 지침 중 하나이다. 

오늘날 정당 민주주의는 점점 더 심의와 멀어지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개별 사안별로 진지한 논증을 검토하고 구성함으로써 기여하기보다는 정치적 논의는 거의 대부분 당파에 대한 지지 여부에 관한 설득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위험은 명제와 명제태도, 논증과 설득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고에서 초래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별불능은 당파적 사고가 공적 의사소통의 장을 지배하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퇴락시키고 있다. 
당파(faction; 黨派)란 공통의 신조나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그 실현을 위한 핵심 정책군(政策群)을 권력을 통해 실행하고자 하는 무리를 이룬 사람들을 말한다.  
당파의 본질적 목표는 (1) 설정된 정책군의 달성, 그리고 필요하다면 (2)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의 획득이다. 
당파적 태도란 자신이 실제로 속하거나 속한다고 생각하는 무리의 이익에 유리하거나 그 무리의 지배적 견해에 합치한다는 점을 유관한 근거로 간주하고 이에 따른 결론을 주장하고 그 결론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위를 실행하는 태도이다. 
당파에 속하여 활동함(당파를 플랫폼으로 활용함)과 당파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구별된다. 당파의 사전적 의미는 대단히 중립적이다. 당파(faction; 黨派)란 구성원 전체에 의해 현실적으로 공유되고 있지 않은 공통의 신조나 이해관계를 특별히 공유하며 그 실현을 위한 핵심 정책군(政策群)을 권력을 통해 실행하고자 하는 무리를 이룬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의미의 당파는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이다. 
이익집단으로서의 당파를 살펴보자. 모든 구성원의 이익을 온당하게 배려하는 의사결정을 하려면, 어떤 면에서 공통된 이익 구조를 가진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되고 불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 정치적 논의의 장에 올라와 하고, 그렇게 정치적 논의의 장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관한 사정을 또렷하고 분명하게 표명해주는 조직적 통로는 필요하다. 그러한 조직적 통로가 없다면 논의되는 정책과 관련되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구성원의 이익과 불이익에 관한 사정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업종에 대한 규제를 도입하면서, 그 규제가 그 직역의 직업 수행과 지속적 사업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그 직업 종사자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또는 그 업종이 생산하는 재화와 용역의 주된 수요자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정책은 당연히 고려하여야 할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입안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금리의 급격히 여러차례 인상하면서 그것이 소득이 가장 낮고 실업에 가장 취약한 계층 또는 국가의 정책에 의해 유도되어 빚을 많이 진 개인이나 기업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입안하지 않은 채 실행하는 경우도 당연히 고려해야 할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 전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시설이지만 그 지역 환경에는 불이익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하면서 그 지역 주민들에게 정확히 어떤 생활상의 불이익이 주어지는가를 조사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고려해야 할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제안되는 정책이 가장 구체적인 층위에서 일부 집단에게 더 순이익이 된다는 것, 또는 일부 집단에게 불이익이 된다는 것만으로는 그 정책이 부당하거나 편파적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이는 재판에서 원고가 패소하고 피고는 승소하는 판결이 그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원고에게는 순이익이 되고 피고에는 순손실이 된다고 하더라도 재판이 부당하거나 편파적이라는 근거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책이 공익을 위한 것임은 그 정책이 실현하고자 하는 이익이 보편적인 보장 형식으로 추구되는 이익이며, 그 정책이 그러한 보편적 보장형식의 구체적인 적용 형태임을 보여줌으로써 논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체의 손상으로 인해 노동능력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에 대한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국가의 지원은, 온전한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순손실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순이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보편적인 공익 원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보장제도는 누구라도 극히 취약한 경우에 빠진 경우에는 존엄성을 가진 인간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보장형식에 부합하는 정책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직역이건 계급이건 지역이건 제안되는 잠정적 정책 후보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특유하게 영향을 미치는 집단들을 구별하고, 논의의 장 위에 올라오는 그 집단의 목소리가 대변하는 이익에 관한 사정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직업 종사자들, 계층, 지역 주민들 등 어떤 측면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군이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구성하여 조직화된 통로로 자신들의 사정과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정치과정 중 하나이며, 조직화된 당파의 주장을 청취하고 거기서 제시된 근거들을 검토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과정의 필수 부분 중 하나이다. 물론 조직화된 집단의 이익이 조직화되지 않은 집단의 이익보다 더 대변될 가치가 있다거나 응당 더 큰 비중을 부여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는 조직화의 원천이 되는 자원의 불평등이 부당하게 조직화에 영향을 미쳐 정치적 장으로 그 이익에 관한 사정을 전달하는 채널이 부당하게 왜곡되는 것을 교정하는 별도의 문제이지, 이익 당파 자체의 존재 의의를 부정할 사유는 되지 못한다. 모든 의견은 취합되고 조정되어야 할 수밖에 없으며, 먼저 당파 내에서 합리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근거로 논증을 제시할 수 있는 대표적 논증 참여자가 있다면 공적 의사소통의 장은 더욱 효과적인 통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집단과 조직화된 집단의 이익 표명의 양과 강도의 차이는, 공무수탁사인으로서 항상적인 공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아닌 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직접 결사체가 지원받는 모든 지원제도를 금지하고, 결사체에 보낼 수 있는 복수의 소액의 쿠폰을 국민들 개개인에게 지급함으로써 어느 정도 완화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념집단으로서 당파의 경우를 살펴보자. 자신의 이익이 직접 걸려 있지 않더라도 입헌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공권력의 작용에 관하여 각종 의견을 낼 수 있으며 때로는 다른 시민들의 어떤 태도나 행동을 촉구하는 의견도 언제든 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특정 의제 영역과 관련하여 의견이 대체로 합치하는 이들은 함께 협업함으로써 그 의견의 전파를 더욱 용이하게 하고 그 의견의 국가 정책으로 실현을 효과적으로 도모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건 개인 한 명이 도모할 수 있는 의제는 극히 제한적이다. 소설을 쓰거나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정책을 입안하고 통과시키는 등의 일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같은 의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 의제를 함께 추구하는 활동을 하는 것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념집단으로서의 당파 역시 입헌민주주의 사회의 당연한 현상이며, 이는 존 롤즈가 '다원주의의 사실'이라고 일컬은 자유주의 사회 운영의 전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원주의의 사실을 부인하거나 소멸시키는 전제에 서는 것은, 국민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통일된 이념으로 교육시키고 그에 상치되는 의견은 폭압적으로 억압하는 독재를 전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시행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복수정당제를 그 필수부분으로 포함하고 있으며, 정당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되어 정당해산심판절차를 통해 해산결정을 받지 않는 한 강제로 해산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정책 시행의 전제가 되는 이익에 관한 사정을 논의의 장에 올려 놓는 역할과 중요한 의제를 함께 관철시키려는 공동 노력을 구성하기 위한 통로인 당파에 속함과 당파적 사고 및 태도를 취함은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파에 속하고 구성원들이 당파를 형성하여 입헌 민주주의 사회가 운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당파적 사고를 포함한 당파적 태도를 입헌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의 정상적 태도라 착각하게 된다. 
당파적 태도에 의하면 쟁점에 관한 논의와 판단과 실천은 거꾸로 진행된다. 원래 쟁점에 관한 논의는 어떤 쟁점에 관하여 참이고 타당한 해결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논의에서는 논증대화의 규칙을 지키면서 여러 논증들이 자유롭게 제시된다. 그 논증들을 두루 살핀 뒤에 유관한 논거들을 적합하게 결합하여 승인되는 결론이 무엇인지 가려냄으로써 판단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판단이 내려지고 난 뒤에 그 판단을 행위로 실행하고자 하며, 그에 따라 같은 판단을 하는 사람끼리 협업을 진행하게 된다. 반면에 당파적 태도에 의하면 협업을 진행할 무리가 먼저 선정된다. 그러면 그 무리가 판단을 제시한다. 그 판단에 따라 허용되는 논거와 허용되지 않는 논거가 구별된다. 따라서 무리가 먼저 선정되고 나면 허용되지 않는 논거는 자동적으로 배제되고, 그래서 논증의 모습이 그제서야 확정된다. 
당파적 태도의 인지 과정이 이렇게 도치되어 있으므로, 당파적 태도는 진리의 논의에 명백히 부적합하다.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제도 역시 진리를 지향하는 논증대화를 토대로 운영된다. 물론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운영이 토대로 삼는 진리는 영원불변의 것은 아니고 잠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또한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진리의 범위도 제한된다. 그러나 그 제한된 범위에서 사실명제와 규범명제의 참과 거짓을 따지지 않고서는 그 어떤 정책 제안도, 정책에 대한 찬성과 반대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당파적 태도는 치명적이다. 만일 현재 실업률이 1%인지 10%인지 물가상승률이 1%인지 20%인지조차 가려낼 기제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면, 국가가 각종 유인과 제재로 접종시키는 백신의 예방효과가 30%인지 60%인지 90%인지조차 가려낼 기제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와 관련된 정책을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은 그저 한낱 강변하는 수사요, 감정적 토로요, 근거 없는 몸짓에 불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헌법의 특정 조항을 타당하게 해석하여 얻은 규범내용이 A인지 not A인지를 가려낼 기제를 갖지 못하다면 어떤 법률이 위헌이라는 반대나 합헌이라는 찬성의 주장 역시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당파적 태도는 인지적 과정을 도치시키며, 또한 인지 과정을 왜곡시키는 여건을 더욱 더 심각하게 강화한다. 
따라서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파라는 플랫폼의 활용은 민주주의의 정상적 부분이지만, 당파적 사고는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당파적 사고를 취하면서도 자신은 비당파적 사고를 하고 있을 뿐이고 그것이 우연히 자신이 늘 지지하는 당파의 지배적 견해와 일치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연스런 것인데, 인식적 상태는 인식적 과정 중 일부만에 적용되는 간접적 지침에 의해서만 규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참인 것만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를 직접 자신의 믿음 상태에 적용할 수 없다. 믿음 상태 자체는 행위가 아니므로 그 자체만 떼어내서 당위가 적용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 상태를 초래하게 된 과정 중 일부에는 행위가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개입하는 지점에 대해서 직접 적용될 수 있는 지침은, 당파적 사고를 간접적으로 제어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위의 지침을 마련하고 이를 준수하는 것이 입헌민주적 사고의 지침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그 지침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i) 사상과 신조 체계, 또는 어떤 제안의 발안자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정교한 논의가 아닌, 총괄적인 인상비평이나 찬반의 결론적 견해만 밝히는 일을 피한다. 
(ii)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만큼의 근거와 이론을 제시한다.  
(iii) 신뢰할 수 있는 관찰 및 산출과정에 의해 생성된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규범적으로 타당한 규범논증을 전개하여, 정책 및 법에 관하여 논의에 참여한다. 
(iv) 그 주제 자체와 관련되지 않은 당파 그 자체에 대한 찬반을 해당 주제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v) 당파에 대한 지지와 반대 여부는 선거시기와 같이 그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될 때에 필요하다면 꼭 필요한 만큼만 한다. 

6. 정리

‘입헌민주적 사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된 사고의 지침은 그 중 중요한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제시된 지침들은 입헌민주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며, 여기에 직접 거론되지 아니한 것들도 이 지침으로부터 파생되거나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룬 지침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정치적 정당성의 질문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답인 정치적 정당성의 가능조건이 모든 국가권력 행사의 필요조건임을 유념한다. 
(2) 윤리, 도덕, 정치도덕, 구조적 정치도덕을 구별하고, 상위 층위의 당위가 하위 층위의 당위를 제약함을 이해한다. 
(3)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최고원리에 의해 지도되는 구성원들의 관계를 보장하는 것으로 헌법규범의 이해한다. 즉 목적론적 이해를 피하고 의무론적으로 기본권규범을 이해한다.  
(4) 주권의 행사를 의사작용의 다수결적 관철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에서 참여하는 일반의사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제도적 장을 계속 유지하고 그 의사소통의 제도적 장에서 심의하고 내린 결론이 국가의 권력행사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도록 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 
(5) 입헌민주주의 구성원으로서 심의에의 참여는 개별 사안별로 명제의 참과 거짓을 확립하는 원리에 의거한 논증으로 의사소통에 기여하는 것을 우선적 내용으로 하는 것임을 유념하고 당파라는 플랫폼은 필요하다면 활용하되, 당파적 사고는 배격하고 이를 위해 간접적 지침을 준수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