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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학] 인간 단면 이론

by 시민교육 2024. 7. 4.

이 글에서는 스토아적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 중 하나로, 알 수 없는 것과 변하는 것에 대한 태도의 한 분야로서 사람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겠다. 그 태도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기대를 갖지 않고 변하는 것에 대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기대를 갖지 않으며, 지금 드러나는 것에 대응하여 적합하게 행위하는 태도(가치 있는 것은 소중하게 향유하고 가치 없는 것과는 연루되지 않는 태도)’이다. 이 태도의 전제가 되는 이론을 단면 이론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이론을 토대로 삼아 사람에 대한 태도를 단면의 연쇄 이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먼저 단면이라는 용어에 관해 다소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사람은 시공간 내의 연속체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행위자성을 발휘하면서 대하는 존재는 시간적인 면에서도 공간적인 면에서도 연속체의 단면이다. 물론 단면은 연속체의 일부이다. 그러나 단면을 대할 때 단면을 대하는 적합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이성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속체 전체의 모습을 추정하거나 연속체 전체와 한꺼번에 접하는 맥락을 상정하고서 지금 실제로 처한 맥락이 아닌 그 상정된 맥락에서 행위하는 것은 어리석다.

단면을 보고서 이성적 근거 없이 전체를 추론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 한 가지 우화를 살펴보는 것이, 비록 둘러가는 것이긴 하지만, 유용하겠다.

 

어떤 인류학자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수렵채집 부족에 대한 현장 연구를 갔다. 인류학자는 이 부족의 언어 역시 세계의 사물을 가리키고 그 사물간의 관계를 언급하여 사태를 기술하는 부분을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들의 언어를 배웠다. 이 부족민들이 검지손가락으로 어떤 대상을 가리키면서 어떤 단어를 말하면, 그 단어가 바로 그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이거나 고유명이었다. 예를 들어 부족민이 손가락으로 돌을 가리키면서 이우키라고 했는데, 인류학자는 이우키라는 단어를 써서 부족민들에게 돌에 관해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학자가 부족민과 어울려 생활한지 3개월 정도 되던 어느 날 이 부족의 남성들이 사냥을 가는데 인류학자가 참관하게 해주었다. 사냥팀이 천천히 전진하던 중, 우두머리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다른 남자들도 일제히 멈추고 숨을 죽였다. 우두머리가 흥분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카부사키!” 그러자 다른 남자들도 카부사키!”라고 흥분한 어조지만 속삭이듯 말했다. 인류학자는 눈 앞에 토끼 여러마리가 풀을 뜯는 모습을 보았다. 인류학자 곁에 있던 친해진 남자가, 인류학자에게 늘 그랬듯이 호의를 베풀어, 토끼들을 가리키면서 카부사키!”라고 말했다. 사냥팀은 훌륭하게 토끼들을 포위하여 포획했다. 그 날 부족민들은 즐거워하며 실컷 토끼를 나누어 먹었다. 인류학자는 토끼가 카부사키!”라고 암기했다.

그런데 어느날 인류학자가 자신의 부족민 친구와 단 둘이 산책을 나갔는데, 토끼 여러 마리가 재빠르게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인류학자가 그 토끼들을 가리키면서 카부사키!”라고 속삭이듯 말했지만, 부족민은 고개를 저었다. 부족민은 그 토끼들을 가리키면서 자부자부라고 무심한 듯 말할 뿐이었다. 인류학자는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토끼를 가리키는 말은 카부사키!”인 것인가 아니면 자부자부인 것인가?

인류학자가 그 부족민들과 2년을 넘게 살고 나서야, 그는 그 부족민의 언어에 대해 자신이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그 부족민의 언어는 실천적인 상황에 따라 대상들을 다른 개념으로 지칭하였다. 사냥의 대상인 토끼들은 카부사키!”였다. 그 토끼들은 흥분해서 언급할 대상이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사냥이 성공만 한다면 먹을 수 있는 대상이다. 카부사키!”가 나타나면 이제부터 극도로 조심하여 그것들을 잡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해 행동해야 한다. 만일 어떤 실수를 하여 그 토끼들을 잡지 못했다면 아쉬워 할 일이고, 그 실수를 점검하여 다음 번에는 그런 실수가 없도록 개선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친구와 단 둘이서 창과 그물도 없이 무심히 산책하다가 만난 토끼들은 자부자부였다. “자부자부를 마주쳐도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하던 산책을 하면 된다. 토끼들은 재빠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이 없으면 그리고 창과 그물이 없다면 도저히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토끼를 놓쳤다고 하여도 하등 아쉬워할 것이 없다. 실수 점검하고 개선점을 생각해볼 이유도 없다. 즉 부족민들은 그 대상이 자신들에게 어떤 실천을 촉발하는가, 어떤 실천적 대응이 적합한가에 따라 달리 불렀던 것이다. 부족민들의 언어는 거의 전부가 행위자의 실천적 관점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적어도 행위자가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의 관점(실천적 관점)에서 대상은 그 자체로서 본질을 갖지 않고 행위자의 실천적 상황과 연계하여 독특한 성질을 가지므로, 그 성질들을 가지는 그 대상의 (시공간 또는 상황적) 단면에 대하여 개념을 결부시켰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우리의 실천적 합리성은 행위자성을 발휘하는 맥락에서 이성적 근거를 가지고서 분별할 수 있는 한 현상을 분별하여 그에 각각 적합한 대응을 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는 핵심 논점이 아니다. 수렵·채집 부족이 아닌, 거대한 분업구조를 가진 사회의 언어는 직접 대상을 직면한 행위자의 관점과 무관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자연과학의 언어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토대가 되며 잘 보살펴야 하는 지구도 행성이지만, 이 지구와 천체물리학적 특성을 고유하고 있는 천체도 행성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언어조차 세계에 대해 체계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행위자라는 관점에서 분명 영향을 받는다. 자연과학에서 언급되는 대상들도, 그 자연과학 이론 내에서 세계를 과학법칙적으로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 구별하여야 할 때에만 다른 개념을 쓴다. 똑같은 암석형 행성이지만 지름이 1mm만 차이난다고 해서 다른 개념을 사용하여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을 하나의 명칭으로 지속해서 지칭한다고 해서, 그 관계에 있는 한 그 사람과의 대응을 똑같이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언어상의 구별은 적합한 실천적 대응상의 구별보다 미분화될 수밖에 없다. 만일 언어상의 구별이 모든 실천적 대응상의 구별을 반영해야 한다면, 언어는 그 어떤 사물이나 현상, 행위도 고정적으로 지칭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그런 구별을 명사형으로 하지 않는 언어를 가지고도 상황에 따라 적합한 실천적 대응을 표현하는 문장들을 생성할 수 있다.

이 우화에서 중요한 교훈은 하나의 실천적 지혜이다.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태도를 보이며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에 따라 대상을 구별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지혜이다. 그 지혜를 여러면에서 뚜렷하게 담아내는 부분이 많은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혜 그 자체이다. 그리고 실천적인 관점에서의 차이를 뚜렷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환상 때문에 그 지혜를 잃어서도 안 된다.

사람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우리의 언어는 인간 유기체이자 이성적 행위자성을 보유한 개체들을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그 고정적 지칭은 실제로 상당한 맥락에서 적합하다. 특히 법제도를 통한 정치도덕적 대우가 주제일 때는 그러하다.

그러나 어떤 특성을 보유한 개체들을 고정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을 사용하는 유용한 언어생활로 인하여 그 언어상의 구별이 실천적 대응의 구별 자체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그런 오류에 빠지면 사람을 다양한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마주할 때 적합한 실천적 지혜를 놓칠 수 있다. 게다가 자유주의적 의무론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는 경우에는 정치도덕적으로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낳을 수 있다.

언어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인하여 놓칠 수도 있는 실천적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때 그들의 고정적 본질 전체에 대하여 어떤 단일한 관계를 맺고 태도를 보이고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로도 그러하고 당위로도 그러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삶을 살아가며 사람들과 협업하고 중립적으로 대하고 비판적으로 대하고 결별하고 할 때 우리는 그들의 고정적 본질 전체에 대하여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 이는 원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시공간과 상황, 그리고 사람이 하는 행위와 보이는 태도, 사람이 가진 변할 수 있는 다단한 속성에 따라 복합적으로, 달리 대우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대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실천적 관점에서도 적어도 일정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모든 다른 대우의 토대가 되는 본질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도덕법에 자신의 행위를 일치시킬 수 있는 존재로서 가지는 존엄한 지위, 즉 인간존엄성이다. 그러나 인간존엄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도 다기(多岐)한 대응이 가능하다. 그래서 존엄한 인간이라는 기본적 지위를 넘어선 구체적이고 특정한 내용의 본질까지도 모든 상황에서 고정되어 있다고 보아 바로 그 구체적이고 특정한 내용을 가진 존재로 대하는 것은 네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복잡한 사회의 협동적 분업을 비롯한 상호작용을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현저히 간섭한다. 길동은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늙어서 사망할 때까지 길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길동에 대한 관계와 태도를 고정해놓고 대하지 않는다. 길동이 어릴 때는 어린이로서 대우한다. 길동이 학생이라면 학생으로서 대우한다. 길동이 거래처 기업의 과장이라면 거래처 기업의 과장으로서 대우한다. 물론 길동이 어리든, 학생이든, 거래처 기업의 과장이건 길동은 존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대우한다. 그러나 그 이외의 대우는 길동을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상황에서 마주하였으며 길동 본인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길동이 출근길에 무심히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라면 그에 맞게 대한다. 만일 길동과 어떤 상황에서 어떤 관계에서 대하건 똑같이 대우한다면 양육도, 교육도, 거래도, 법질서의 유지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둘째, 개인의 책임 하에 발휘된 행위자성에 무감하게 되고, 개인의 행위자성에 기초한 질서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길동이 훌륭하고 진지한 사람이며 나를 좋아하며 책임감까지 있다면 친우로서 대한다. 길동이 범죄나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길동을 종국에는 형사책임과 민사책임을 져야 할 사람으로 대한다. 길동이 입이 가벼워서 어디서나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길동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한다. 만일 길동이 어떤 행위를 하건 그래서 길동이 어떤 책임을 지게 되건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면, 행위자성을 기반으로 한 책임귀속의 체계는 무너질 것이다.

셋째, 평화로운 공존 상태를 침식하거나 파괴하면서도 그러한 행위가 타인의 인격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에 대한 적합한 대응은 그 다른 사람이 자신의 행위자성을 어떻게 발휘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만일 그 다른 사람을 모든 면에서 한결같이 대우한다면 그 다른 사람을 행위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행위자성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오로지 여러 믿음, 태도, 감각을 경험하는 수용자성만을 가진 존재로 대우하는 셈이다. 수용자성만을 가진 존재는 그 존재가 수용하는 또는 그 존재를 포함하는 모든 수용자적이기만 한 존재들이 수용하는 여러 선들의 총합 또는 균형적 상태를 최선으로 만들어줄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것을 믿지 않는 사람 역시 언제나 혼란에 빠져 갈 길을 잃은 불쌍한 존재이며 따라서 어떻게든 자신이 믿는 것을 믿게 하는 최고로 효과적인 수단강제로 믿게 하면 역효과가 나서 그 효과적인 수단이 강제가 아닌 유도나 조작이라 할지라도을 동원하여 적용할 대상에 불과하게 된다. 행위자성을 가진 존재들의 평화로운 공존 상태는 인격에 대한 존중이 동등한 행위자성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다는 점을 망각하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 사회에서 소수 세력이 되거나 집권세력에서 밀려나게 되면 다수나 권력 있는 세력의 신념을 믿도록 부당하게 강제, 유도, 조작될 수 있는 지위에 놓이게 된다고 여기는 구성원들은, 자신이 권좌에 있을 때 모든 다른 신조의 싹을 자르려고 할 것이다.

넷째, 현재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게 되며 불필요하게 과거를 반추하거나 불필요하게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좌절하거나, 가치 없는 상호작용이 자신의 삶에 계속 잔향을 미치도록 만든다

현재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현재의 경험에 집중하는 기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경험에 집중하는 기량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원칙에 입각한 타당한 태도를 전제로 성립한다. 이러한 태도를 전제로 하지 않고 현재를 즐기라거나 현재에 집중하라는 조언은 힘을 갖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대할지 원칙을 세우지도 않았거나 그 원칙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면, 현재에의 집중은 억지로 정신을 구획화하여 잠깐 이루어지는 것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주 쉽게 다시 배회하여 과거와 미래를 향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읽고 듣고 말하는 아주 많은 것들이 과거와 미래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접촉과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단지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란 애초부터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전형적이지만 추상적인 예추상적인 예이므로 친구 관계, 직장 동료, 같은 신조를 추구하는 단체의 구성원, 거래상의 관계, 취미 모임의 지인 등등 모든 종류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를 생각해보자.

 

병과 정이 만났다. 병은 정에게 호감을 느낀다. 또한 병이 느끼기에는 정도 병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병과 정은 일정 장소와 일정 시간 동안 우호적이고 긍정적 상호작용을 한다. 우호적 상호작용의 최협의 요소는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 협의요소는 예의를 지키는 것, 광의의 요소는 함께 가치를 향유하는 것, 최광의의 요소는 서로의 복리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쓰는 것이다. 병은 정의 상호작용은 제3자가 관찰할 때에는 광의의 요소까지를 포함하였다. 병과 정은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고 예를 지키면서도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병은 이러한 경험이, 정이 자신의 복리에 특별한 마음을 쓰는 것 최광의의 요소까지 기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특정되게 만든다고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대로 인해 병은 정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큰 욕구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병은 정과 있는 시간이 특별한 관계로 가는 수단으로서만 바라보고, 그러한 최종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곤 한다. 그러나 정은 실제로는 그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우호적이고 긍정적 상호작용을 하지만, 병이 원하는 만큼 정과 더 가까워지지 않는다. 병은 정과 이미 특별한 관계로 전진하는 경로 도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특히 자신의 관점으로는 병 자신에게 희생을 수반하는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처음에 정은 이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다가 결국 오히려 뒤로 물러서게 되었고, 이에 대단히 화나가 난 병은 예의를 지키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정의 권리까지 침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병은 자신의 행위는 기대를 배신한 사람에 대한 응징이므로 정당한 것이거나, 최소한 이해할 만한 적합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위 이야기에서 병은 몇 가지 사고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첫째,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친밀관계로 가는 경로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지 그때그때 확인할 수 있는 것뿐이다.

둘째, 친밀관계로 가는 경로상으로 전진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규범적 기대를 품었다. 특별한 친밀관계로 가는 경로상에 있다는 것은 가설을 세울 수 있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규범적 기대를 가질 현상은 아니다.

셋째, 우호적 상호작용의 층위에서 최협의, 협의, 광의, 최광의의 우선순위를 뒤집었다. 어느 때건 이 순서는 지켜져야 한다. 최광의의 우호적 상호작용의 정당화되지 않는 규범적 기대가 좌절되었다고 하여 협의나 최협의의 층위의 태도마저 무너뜨리는 것은 이 우선순위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넷째, 어떤 시간 동안 가치 있는 향유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한낱 수단적으로 바라봄으로써 향유를 온전히 하지 못하였다. 설사 어떤 경험이 수단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내재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 내재적 가치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가치에 대한 적합한 태도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을 읽고 어떻게 활용할까만에 집중한다면 공부의 즐거움이 많이 줄어든다. 여행을 가서 사진을 어떻게 멋지게 남길까에만 집중한다면 실제로 신체에 직접 체험되는 감각을 느끼는 즐거움이 많이 줄어든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과 결국 어떻게 더 발전될까를 생각한다면 현재의 시간이 주는 긍정적 가치를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병이 알았어야 하는 것은 그 반대이다.

첫째, 정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 정과의 우호적 상호작용이 어떻게 될지의 문제는 전지적 관점에서 모두 파악하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그런 지식을 병은 갖고 있지 않다. 병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정확하게 자각했어야 한다. 아는 것은 단지 정이 자신과의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과 맥락 속에서 지금 보이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과거에 보였던 모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뿐이다. 정은 그저, 지금까지 병과 만났던 구체적 시공간에서 우호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둘째, 적어도 1인칭의 실천적 지혜의 관점에서는 변하는 존재인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가설은 세울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로서 규범적 기대는 할 수 없다. 규범적 기대는 물론 2인칭의 관점에서는 공식화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포괄적인 윤리적 삶에서의 실천적 기대는 스스로에게 적용되는 규범적 기대를 제외하고는 1인칭의 관점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스스로 권리의 존중과 예의의 준수는 하되,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가설만을 세울 뿐 규범적 기대를 투영해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해서는 타인이 앞으로 나의 권리를 존중할지 예의를 지킬지 여부에 대해서도 규범적 기대를 확고하게 갖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러한 규범적 기대가 정당화되는 경우는 상대방의 언행일치의 자료가 보여주는, 의무론적 자유주의자로서의 속성이 충분히 확인된 경우뿐이다. 의무론적 자유주의자는 기본적인 정치도덕적 권리와 도덕적 권리가 모든 삶의 행위 준칙으로서 가장 최우선적인 제약을 이룬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만날 수 있는 목적론자들은 자신이 중대하다고 생각하는 목적에 일치하는 한에서만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기 때문에이는 그들의 규범관에서 권리와 같은 규범은 그들이 매우 중요시하는 가치를 위해 복무하는 간접 규칙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점에서는 권리가 가치에 의해 주형되므로 권리를 침해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그러한 규범적 기대를 하는 것은 적어도 1인칭의 실천적 관점에서는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권리는 그 목적을 위한 간접 규칙일 뿐이므로, 권리의 내용 자체가 그 목적에 의해 주형된다고 공언하거나 그러한 공언을 지지하게끔 되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 역시도 2인칭 관점에서 규범적 기대를 적용받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이 실제로 그 규범적 기대를 준수할 것이라는 1인칭 기대를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강도가 지금 폭력으로 재산을 강탈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 강도가 인신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하는 규범을 준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의무론적 자유주의자조차, 광의와 최광의의 요소는 규범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권리를 침해한 적도 없고 예의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지내기에 좋은 사람이 되지 않거나 특별히 마음을 써야 할 사람이 되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사에서는 너무나 일반적이고 보통이며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병은 최광의의 요소까지에 대해 확고한 규범적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셋째, 우호적 상호작용에서 권리의 존중과 그에 어긋나지 않는 한 예의의 준수는 언제나, 가치의 공동 경험과 상대방의 복리에 특별한 관심에 우선한다. 곧 목숨을 잃을 자식의 장기를 마련하기 위해 낯선 이를 납치하여 장기를 적출하고는 보내서는 안 된다. 자식은 목숨을 살리고 낯선 이는 장기 하나가 없는 채 계속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허용되지 않는다.

넷째, 인생의 의미 경험은, 언제나 현재 경험하는 가치 경험으로 구성되므로, 정당화되지 않는 규범적 기대에 함몰되어 현재의 가치 경험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고, 이미 인정되는 자료들만 가지고 가설을 약하게 세우면서 현재의 긍정적 가치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기대를 갖지 않고 변하는 것에 대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기대를 갖지 않으며, 지금 드러나는 것에 대응하여 적합하게 행위하고 향유하는 태도이다. 이 태도의 전제가 되는 이론을 단면 이론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를 사람에 적용했을 때 사람 단면 이론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인생들은 단면의 연쇄이며 사람도 단면의 연속체이다. 우리는 각 단면 중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직접 본 단면의 극히 일부에서 나머지 전체를 다 확신하고서는, 실천적 지혜의 관점에서 부당한 기대를 가지고는, 예의도 권리도 사소하게 생각하는 울화와 조급한, 불안함과 초조, 울분과 좌절, 실망과 배신감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진 모양새에서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지만,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이 실천적 지혜에 의해 지지되는 면은 결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