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번역자 해제
1. 사상사적 위치
크레이머의 「The Rule of Misrecognition in the Hart of Jurisprudence」는 20세기 후반 법철학의 전환적 국면 속에 자리한다. Hart의 『법의 개념』(1961)은 오스틴식 명령이론과 켈젠의 근본규범론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법실증주의를 새로운 분석철학적 기초 위에 세운 저술로 평가된다. Hart의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 개념은 법체계의 통일성과 법규범의 타당성을 설명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했으며, 이는 한편으로는 전통적 법실증주의의 권위주의적 요소를 벗어나려는 시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규범성에 대한 분석적 설명을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크레이머의 논문은 바로 이 Hart적 기획을 자유주의적 담론의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그 내적 모순과 순환성을 드러낸다. 그는 Hart의 법철학을 “자유주의적 중용의 사상사”라는 큰 맥락에 배치한다. 즉 Hart는 오스틴적 형식주의(formalism)와 미국식 법현실주의(rule-scepticism) 사이에서 절충적 중용을 지향하였는데, 크레이머는 그러한 절충의 시도가 결국 자기파괴적 긴장 위에 서 있음을 밝힌다. Hart가 법체계의 규범적 기초로 설정한 승인 규칙은, 그 자체로는 규범성을 생성하지 못한 채 반복과 순환, 그리고 무한퇴행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1) 법실증주의 전통 내부에서 Hart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지적한다는 점에서, (2) 자유주의적 법철학의 사상사적 맥락을 해부한다는 점에서, (3) 해체론적 방법을 법철학에 접목하여 새로운 자기비판적 국면을 여는 의미를 법사상사 속에서 차지한다. 다시 말해, Hart 이후의 법실증주의가 단순히 규범성의 기초를 새로 세우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언어적 장치 자체가 자기 해체적 구조를 지닌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크레이머의 논문의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다.
2. 승인의 규칙의 악순환성 문제
이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하트의 법실증주의 이론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승인의 규칙(rule of recognition)이다. 하트는 『법의 개념』에서 법체계의 존재와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1차 규칙(primary rules)과 2차 규칙(secondary rules)의 구별을 제시하였다. 1차 규칙은 개인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의무 규칙이고, 2차 규칙은 이러한 1차 규칙의 생성, 변경, 심사 절차를 규율하는 메타 규칙이다. 이 가운데 승인의 규칙은 2차 규칙들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 규칙으로서, 법체계 내에서 “무엇이 유효한 법규범인가”를 판정하는 궁극적 기준(ultimate criterion)을 제공한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 “여왕과 의회가 제정한 것이 법이다”라는 명제가 승인 규칙에 해당한다. 이는 법관이나 공무원들이 실제로 법을 식별하는 데 사용되는 사실상의 사회적 관행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승인의 규칙은 명문화된 헌법 조항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암묵적으로 형성된 실천적 기준이며, 법 공무원들(특히 법관과 입법기관 구성원들)의 관행적 수용에 의해 유지된다.
이 개념이 하트의 이론에서 중차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법체계의 통일성 확보이다. 다양한 법규범들이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체계”를 이루는 것은, 모두가 동일한 승인 규칙으로부터 유효성을 파생하기 때문이다. 승인 규칙은 체계 전체를 묶어 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둘째, 법적 유효성의 최종 기준 제공이다. 특정 규칙이 유효한 법인지 여부를 논할 때, 그 타당성은 결국 승인 규칙에 의거해 판단된다. 승인 규칙은 법체계 내에서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최종적 기준이므로, 법적 타당성 논의의 종착점이 된다. 셋째, 사실과 규범의 결합 지점이다. 하트는 승인 규칙의 존재가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라고 보았다. 즉, 그것은 법 공무원들의 실제 관행적 수용에서 드러난다. 동시에 그러한 수용은 규범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 지점에서 하트는 오스틴의 단순한 명령-복종 이론과 결별하고, 법의 규범성을 설명하는 핵심 장치로 승인 규칙을 제시한다.
결국, 승인 규칙은 하트의 이론 전체를 지탱하는 토대라 할 수 있다. 그것 없이는 법체계의 통일성도, 법규범의 유효성 기준도, 나아가 법과 단순한 강제 명령의 차이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승인 규칙은 하트 법이론의 “근본 구조적 축”이다.
그런데 크레이머에 따르면 하트의 승인 규칙 이론은 근본적으로 순환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트는 승인 규칙을 법체계의 “최종적 기준(ultimate criterion)”으로 제시하면서, 그것을 통해 어떤 규칙이 법인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크레이머는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 관련 집단의 식별 문제이다. 승인 규칙은 법 공무원들의 관행적 수용에 의해 성립한다고 하트는 설명하지만, 그렇다면 먼저 “어떤 집단이 법 공무원인가”를 독립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그런데 하트는 이를 승인 규칙 자체를 통해 규정한다. 즉, 어떤 행위가 승인 행위인지, 어떤 집단이 승인 주체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미 승인 규칙을 전제해야 한다. 이는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기 전에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모순에 빠진다.
둘째, 승인 행위의 식별 문제이다. 승인 규칙은 공무원들의 반복적 승인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하지만, 무엇이 승인 행위에 해당하는지는 승인 규칙을 기준으로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승인 규칙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승인 행위를 관찰해야 하고, 승인 행위를 관찰하려면 승인 규칙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자기지시적 순환이다.
셋째, 역사적·사회적 정당화의 문제이다. 맥코믹이 이 순환을 피하려고 “사회적 지지 집단”이나 “역사적 기원”을 끌어오지만, 크레이머는 이 또한 순환을 단지 한 단계 미룰 뿐이라고 지적한다. 권력 집단이나 전통이 승인 규칙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승인 규칙의 정당화로 작용하려면 먼저 승인 규칙을 기준으로 그러한 지지가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트의 승인 규칙 이론은 “법적 규범성을 규명하려는 출발점이 곧 그 자체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악순환적이다. 승인 규칙이 법체계의 정당성이나 규범성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체가 설명되기 위해 다시금 승인 규칙을 필요로 하므로, 이론은 자기 파괴적 구조를 가진다.
결국, 크레이머가 지적하는 악순환성의 핵심은 승인 규칙을 입증하거나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이미 승인 규칙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3. 맥코믹의 구원 시도 실패
이 논문의 전반부에서 크레이머는 하트의 승인 규칙 개념을 옹호하려는 맥코믹의 시도를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맥코믹은 “승인의 규칙은 궁극적으로 법관들만의 자기 승인(circular bootstrap)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특히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집단(powerful and influential groupings)―의 수용에 의해 뒷받침된다”(p)라는 논제를 제시한다. 만약 p가 순환성에 빠져듦이 없이 그 자체로 독립적 개념과 독립적 논거로 참으로 성립한다면, 이는 하트의 승인의 규칙 개념을 악순환성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법관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오직 자기 확인을 통해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레이머에 따르면 p는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집단’이 무엇인지, 또 그들의 어떠한 행위가 승인 규칙을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지는, 이미 특정한 승인 규칙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코믹의 p는 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단지 악순환의 층위를 한 겹 더 추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맥코믹은 “원시 사회나 봉건적 초기 질서에서는 법관들이 권한부여적 재판 규칙(power-conferring rules of adjudication) 없이도 의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권한부여 규칙이 점차 형성된다”(q)라는 동태적 논제를 제시한다. 만약 q가 성립한다면, 이는 하트의 이론이 내포하는 ‘재판 규칙이 선행하지 않으면 법관의 권위가 불가능하다’는 순환성을 벗어나게 한다. 그러나 크레이머에 따르면 q 역시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분쟁 해결자로 지정된 자들이 실질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려면, 최소한 암묵적·관습적 수준에서라도 권한부여 규칙이 항상 이미 전제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의무는 공허한 것이 되어 결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코믹의 q 역시 체계성의 바깥 기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법적 체계성 내부에서 전제된 결론을 되풀이하는 데 그친다.
특히 q 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맥코믹은 먼저 원시사회를 상정하여, 분쟁 해결에 개입하는 마을 원로들이 단지 의무만을 지닐 뿐 권한을 행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공원에서 축구를 하는 소년들이 구경꾼에게 파울 여부를 묻는 사례를 비유로 제시한다. 그러나 크레이머에 따르면 이 비유는 설득력이 없다. 원로들의 분쟁 해결은 단순한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관습 규범에 의해 정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로들은 분쟁을 해결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단순히 의무만을 지닌 존재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비판을 확장하면서 크레이머는 원시 사회에서도 승인 규칙이 존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트는 이러한 사회를 승인 규칙이 결여된 사회로 보았지만, 크레이머는 오랜 전통에 기반한 규범 준수가 승인 규칙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단지 그것이 고도로 명료하거나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본다. 하트가 이를 “무익한 중복”이라 조롱하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하트 자신의 승인 규칙 설명도 결국 과거의 사실적 패턴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반복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맥코믹은 이어 영국 법사의 서사를 통해 원시적 또는 봉건적 사회에서 권한부여적 재판 규칙이 부재하더라도 법체계가 점차 “이륙(get off the ground)”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초기에는 왕의 대리인(대법관)이 권한 없이 단지 의무만을 지닌 채 판결을 내렸고, 이후 역사적 과정을 거쳐 권한부여적 재판 규칙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레이머는 이러한 설명도 순환성을 피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대법관의 사법적 지위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정례화된다는 것은 이미 권한부여적 규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코믹의 역사적 서사도 결국 처음부터 권한을 전제하며, 그가 목표로 한 비순환적 기점은 확보되지 않는다.
이로써 크레이머는 맥코믹의 시도가 두 가지 이유에서 실패했다고 결론짓는다. 첫째, 그의 서사는 법적 체계성의 바깥에 기초를 두지 못한 채 전제된 결론들을 반복할 뿐이다. 둘째, 그의 역사적 설명은 종국적으로 “완전한 법체계”를 종착지로 전제하기 때문에, 설명의 출발점과 종점을 모두 이론 내부의 전제에 의해 지탱한다. 결국 맥코믹의 서사 역시 질문을 구걸하는 무익한 순환에 빠지게 된다.
맥코믹의 구제 시도가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공동체의 식별 문제, 권한 없는 의무라는 전제와 완성된 구너한 부여 규칙의 모습을 종착지로 전제하지 않은 역사적 서사 설명 모두에서 실패한다는 점이며, 크레이머는 이를 통해 승인 규칙 자체가 본질적으로 순환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4. 하트와 켈젠의 공통 운명
논문의 후반부에서 크레이머는 하트가 켈젠을 비판하면서 전개한 논의의 결함을 지적한다 하트는 켈젠의 근본규범(basic norm) 개념을 불필요한 중복, 곧 “무익한 중복(useless reduplication)”이라고 비판한다. 하트에 따르면 법체계의 승인 규칙(rule of recognition)은 체계 내부에서 최종적이므로, 그 자체가 타당하거나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고, 단순히 수용되어 사용되는 사실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근본규범과 같은 전제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크레이머는, 하트가 제시하는 승인 규칙 역시 동일한 순환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승인 규칙은 그 자체를 타당화할 수 없으며, 과거의 수용 사실에 근거할 뿐, 현재와 미래의 규범적 구속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트는 켈젠의 근본규범을 “빈 반복”이라고 비판하지만, 사실상 하트의 승인 규칙 개념도 동일한 의미에서 “빈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 크레이머의 비판이다.
결국 크레이머의 지적은, 하트가 켈젠의 근본규범을 배제하고 승인 규칙을 통해 순환성을 피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순환성·자기정초의 문제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하트가 켈젠의 전제를 “불필요하다”고 비판하는 순간, 그의 이론은 자기 모순적으로 동일한 전제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5. 크레이머의 해법
이 글에서 크레이머는 Hart의 법실증주의적 기획을 해체(deconstruction)의 틀 속에서 독해한다. 결론부를 보면, 그는 Hart가 의도와 달리 “오인 규칙(rule of misrecognition)”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Hart의 승인 규칙은 규범성을 설명하기보다, 스스로의 전제들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면서 규범성을 오히려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크레이머가 제시하는 것은 긍정적 해법이라기보다 부정적·비판적 결과이다. 그는 “순환적 담론(circular discourse)이 무력화될 필요는 없다. 담론은 자기 자신을 심연의 메아리로 구조화하더라도 여전히 담론으로서 작동한다”라고 말하면서, Hart의 법철학이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법철학적 담론으로서 생산적인 “전환적 효과(displacement)”를 낳았음을 강조한다. 즉, 순환성 자체를 극복하려는 시도보다는, 순환적 구조를 인정하고 그 효과를 분석하는 것이 크레이머의 태도이다.
크레이머는 이후 저술들—특히 『법은 객관적인가(Objectivity and the Rule of Law)』(2007)나 여러 법실증주의 옹호 논문들—에서는 보다 체계적인 답을 제시한다. 거기서 그는 “강건한 실재론적 법실증주의(robust realist legal positivism)”를 옹호하며, 법규범의 존재와 객관성을 사회적 사실의 패턴에 두되, 그 자체의 규범적 함의(normative implications)는 정치도덕적 차원에서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승인 규칙이 법의 규범성을 “정초”한다고 보는 Hart의 구도를 거부하고, 대신 법은 사회적 사실로 존재하며, 규범성은 정치도덕적 평가를 통해 비로소 확보된다는 이중 구조를 수용하는 방향이다.
따라서 크레이머가 순환성 문제에 대하여 제시하는 해법은 법적 존재론(positivism)과 정치도덕적 정당화(normativity)를 구분하는 강건한 법실증주의적 실재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약번역자는 이 논문에서 제기된 하트에 대한 크레이머의 비판, 특히 승인의 규칙이라는 이론적 개념과 그것을 둘러싼 설명이 법의 규범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다만 요약번역자는 승인 규칙이 규범성의 원천일 수 없다는 지점의 함의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하여 고유한 생각을 갖고 있다. 법의 존재론과 규범적 효력론은 질서정연한 사회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날카롭게 분리되지 않는다.
하트와 같은 법실증주의자의 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자적·기술적 차원에 속하는 것이지 실천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물론 하트가 내적 관점(internal perspective)을 거론하면서 사실과 규범의 차이를 오스틴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트의 내적 관점은 온전한 실천적 관점이라기보다 어떤 규칙에 대한 단순한 복종 습관과 구별되는 명제 태도를 기술하는 관점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 역시 참여자적 관점, 실천적 관점으로서는 불완전하다.
온전한 참여자적 관점은 국가의 법에 내용 독립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법의 규범성은 그 내용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판정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사실적 패턴의 구현자로서 단순히 (결국에는 관습적인 수용 패턴이라는 사실로 환원되는) 승인 규칙에 의한 승인 여부에 따라 “이것이 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위 조정의 규칙 체계로서 정당화하는 정치도덕적 논증을 포함시킨 법해석에 의해 파악된 것을 가리켜 “법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크레이머가 포함적 법실증주의를 취하고 있으므로, 이 점에 관하여 크레이머와 요약번역자의 의견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접근 방향 자체가 다른데, 적어도 질서정연한 사회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법을 부분적으로는 사실에 의해 고정되지만 가장 높은 합법성의 수준(특히 헌법 해석의 수준)에서는 성공적인 정치도덕적 논증에 의해 그 내용 자체가 파악되는 것, 즉 정당성의 확보라는 실천적 관심을 최우선으로 하여 파악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 요약번역자의 생각의 요체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민열, “정당성과 합법성의 여러 수준과 그 실천적 함의”라는 논문 참조.
참고로 크레이머의 이 논문은 그의 평소 저술에서 보이는 문체나 스타일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크레이머는 『In Defense of Legal Positivism』(1999), 『Where Law and Morality Meet』(2004), 『Objectivity and the Rule of Law』(2007) 등에서 확인되듯이,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둔 엄격한 개념 분석, 논리적 구분, 반례 제시와 사례 분석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그의 문체 또한 간결하며, 개념 규정—논리적 구분—반론 검토—재구축이라는 분석철학적 패턴을 따른다.
그러나 문제의 논문은 이와 달리 해체(deconstruction)적 어휘와 수사, 수사학적 은유(예컨대 나르키소스와 에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순환·자기해체·심연과 같은 대륙철학적 이미지를 다수 활용한다. 이는 영미 분석철학 특유의 명료성과 차가운 논리적 전개보다는, 데리다나 푸코를 연상시키는 대륙철학적 글쓰기에 더 가깝다.
이와 같은 차이는 두 가지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대상인 하트의 법이론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이 글은 하트를 보완하거나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어 해체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문체 역시 분석철학적 엄밀성보다는 해체철학적 수사와 역설적 이미지를 동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둘째, 시기적·학술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크레이머의 비교적 초기 작업에 속하며, 당시 영미권 법학계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과 법과 문학 운동의 영향이 활발히 논의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학술 환경 속에서 크레이머는 보다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하트를 독해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대륙철학적 어휘와 문체를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글은 크레이머의 평소 분석철학적 글쓰기와 달리 실험적 성격이 강한 글쓰기 방식으로서, 하트에 대한 비판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대륙철학적 수사학을 활용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