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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번역] 사무엘 프리먼 "만민법, 사회 협동, 인권 그리고 분배 정의"

by 시민교육 2012. 8. 7.



SamuelFreeman_ch8_만민법사회적협동인권그리고분배적권리.hwp

 

 

이 글은 롤즈의 사도 사무엘 프리먼이 그의 책 <정의와 사회계약> 제8장에서 “롤즈의 만민법을 다른 학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충실하게 방어”한 글입니다.


아래 내용은 이 글의 내용을 일부 발췌, 요약하여 문답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다른 학자들은 묻습니다.


“왜 <정의론>에서는 자유의 원칙과 평등의 원칙을 다른 사회 목적에 우선하는 원칙으로 제시해놓고 <만민법>에서는 그것과는 다른 원칙을 내세우는가? 왜 정의의 원칙이 국내적으로만 적용하나? 롤즈, 맨, 왓쩝 맨!”


롤즈가 만민법에서 뭐랬길래?


롤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회가 그 시민의 기본적 필요를 제공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정의의 공동 선관에 의하여 규제된다면, 그것은 “적정 수준”의(decent) 사회이며, 만민들의 사회 내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가져 관용되어야 하며, 그 독립성은 다른 만민들로부터 존중되어야 한다. 만민들의 정의로운 사회 내에서는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충족되어야 하는 특정한 분배 정의의 원칙이 없다!

특정한 세계 분배 원칙을 제시하는 대신에 롤즈는, 세계의 모든 개인들의 기본적 필요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결부된(coupled with) 인권에 대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성원 모두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고통을 겪는 만민들”을 원조할 만민들의 의무의 기초를 제시합니다. 원조 의무의 “목표”는 만민의 능력이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적어도 모든 시민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며, 만민들의 사회의 신의성실한(bona fide)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롤즈의 제자들 중 “세계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기, 베이츠 같은 쟁쟁한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롤즈의 입장이 일관성이 없다고 합니다. 아니, 국내에서 적용했으면 국제적으로도 적용해야지, 왜 왔다리 갔다리 하는가?


사무엘 프리먼은 롤즈는 전기 때나 후기 때나 세계적 분배 원칙을 계속 거부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롤즈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일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차등의 원칙과 같은 국내적 정의의 원칙이 적용되는 맥락이, “사회 협동 체계”의 협동 조건을 결정한다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협동이란 무엇인가? 롤즈께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 사회적 협동들은 자발적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못하게 하는, 강제된 노역 상태(forced servitude) 및 다른 여건들이 결여되어 있음을 포함한다.

(2) 사회적 협동은 효율적으로 조정된 행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출역조(work gang)에 속하는 수감자들은 한 집단으로서 꽤나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도로 보수, 쓰레기 수거 등등) 사회적 협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3) 사회적 협동은 또한 호혜성이라는 이념 및 협동의 공정한 조건을 포함하며, 이것이 “합당한”이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그래서 “세계”는 하나의 완결된 사회적 협동체계로 볼 수 없고, 다만, 그 세계를 구성하는 만민들 각각이 사회적 협동체의 최소 조건을 갖추면 ‘적정한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2.

이런 의미에서 ‘인권 목록’이 협소하다는 비판을 살펴보겠습니다.


롤즈가 작성한 인권 목록은 바로 이 ‘사회적 협동의 최소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생명권, 비자발적인 노역상태(servitude)로부터의 자유, 적어도 일부 개인적 재산을 소유하고 사용할 권리 등등. 반면에 투표할 권리와 공직에 진출할 권리는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에 얼마나 중심적인 것이건 간에, 사회 협동 그 자체에 필수적이지는 않습니다.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예를 들어 보면, 어느 정도의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확실히 인권에 속함이 틀림없으며, 롤즈가 “자유권”이라고 부른 것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가족이 아닌 남성과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처벌하는 근본주의 이슬람 사회는 확실히 인권을 침해합니다. 그러나 롤즈는 자유주의적인 표현과 결사의 자유, 즉 예를 들어 국가 상징과 신성한 상징을 훼손하거나 파괴하고 포르노를 즐길 권리, 동성혼을 할 권리까지 포함된 그런 권리가 인권에 포함된다는 점을 부인합니다. (만약에 이런 목록까지 만민들의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요건이라면 한국은 만민들의 질서에 끼어들지도 못합니다)


사회협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의 기본구조”를 구성하는 기본제도입니다. 그런데 사회의 기본구조에 비견할 만한 것이 세계적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정적인 세계국가는 존속하지 않음)


만민들의 사회는 정치 사회가 아니며, 따라서 원초적인 정치적 관할이나 실효적인 기본 정치 권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적 제도가 행사하는 실효적인 정치 권력과 관할은, 이 제도들에 의해, 독립적인 만민들이 그러한 권력과 관할을 인정한 정도까지만 보유됩니다.


롤즈의 의미에서 사회적 협동은 협동의 유일한 종류가 아닙니다. 만민들 사이의 협동이 있으며, 가족, 대학, 교회 및 다른 결사와 집단들 내에서 존재하는 상이한 종류의 협동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회의 기본구조 내에 존재하는 더 작은 결사들에는 “국지적 정의”의 규칙이 적용됩니다.


즉 사회 협동의 조건이 우선, 다른 제도의 정의원칙과는 독립적으로 규명되어야(worked out)한다는 점, 반면에 세계적 그리고 국지적 ․ 결사적 정의 원칙은 기본구조의 정의 원칙을 전제한다는 점은 롤즈의 ”정치적 구성주의“의 일부입니다.


일단 사회의 기본구조를 위한 정의관이 자리를 잡고 나서, 상이한 사회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추가적인 필요가 생깁니다. 국제적 정의에 관한 설명, 또는 “만민법은” 이런 측면에서 사회 정의의 (전제조건precondition이 아니라) 확장이며, 사회적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지요.


롤즈 가라사대,


나는, 만민법을 자유주의적 정의관 내에서 발전시킴에 있어, 합당하게 정의로운, 자유적 만민의 외교정책의 이상과 원칙을 규명해야 한다(work out)고 강조한다. 자유적 만민의 외교정책에 대한 이 관심은 전체에 걸쳐 내포되어(implicit) 있다. (LP, 9-10, 강조는 원저, cf. 83)


이것이 바로 롤즈가 만민법은, “정치적 자유주의 내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만민법이 기본적으로 자유적 만민의 외교정책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세계 정의의 문제는 만민법 내에서 이미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이슈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자유주의적 권리들을 인권으로 여기며 그 모든 권리가 만민법에 의해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자유주의적이지만 적정 수준의 만민들에게,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그 사회의 거의 모든 이들의 도덕관과 정치관과 보편적으로 불일치하는 협동의 조건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만민들의 사회의 공적 이성 내에서는 그러한 조치를 정당화할 여지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조치들은 적정 수준의 만민들을 개인으로서나 만민으로서나 정치적으로 자율적인 존재로 존중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3. 다음으로 원조의 의무.


원조의 의무는 “목표”와 “정지조건”(cutoff)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가 일단 충족되고 나면 그들이 만민들의 사회의 자립적인(self-sustaining) 구성원이 되고 나면, 다른 만민들에 대한 원조의 의무는, 만민들의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온전히 완수된 것입니다.


베이츠, 포기, 누스바움은 공격합니다. 롤즈! 오류에 차 있다. 어떠한 국가나 만민도 다른 만민들보다 더 많거나 적은 자연자원을 “타고날” 응분이 없다는 것은 참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차등 원칙 적용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국내 정부와 같은 권한과 효과적인 기구를 갖는 세계정부 하의 단일한 사회가 아닌 이상, 이러한 재분배 원칙을 실행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하며, 그 현명함에 의문점을 제키하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롤즈는 자연자원이 그 구성원들의 소득과 부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일본의 만민이나, 자원은 빈곤하지만 잘 사는 만민들(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만민을 비롯해 자원은 풍부하나 못사는 나라의 만민들을) 지적하며 롤즈는, 한 국가가 얼마나 잘 사느냐는, 그 국경 내에서 통제권을 가진 자연 자원보다는 그 정치문화와 훨씬 더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차등의 원칙은 운평등주의, 운을 상쇄하는 원칙이 아닙니다. 롤즈의 논지는, 운이나 자연적 사실이 여하한 종류의 소득이나 부의 분배에 영향을 결코 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협동적인 틀 내에서 자연적 자산의 분포는, 오직 그것이 사회의 최소수혜자 구성원들의 혜택을 극대화하는 정도까지만 소득과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논점을 일반화해서 사회적으로 협동적인 틀과 공유된 기본구조가 없는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동(move)은 사회 협동과 공유된 기본구조라는 특별한 정치적 ․ 사회적 관계가 분배 정의에 중요하다는 롤즈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차등의 원칙은 사회의 기본구조에 대한 사회적 협동이라는 조건 하에서 적용되도록 고안된 호혜성의 원칙입니다. 주된 세계주의적 제안, 즉 차등원칙이 세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실제적 문제는, 세계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을 세계적 수준에서 적용할 권위가 있는 정치 행위자(agent)가 없다는 것입니다.



4. 정치적 자율성의 문제.


롤즈는 ‘정치적 자율성’을 고려한다면 차등의 원칙이 세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두 개의 사례를 제시합니다.


두 사례는 모두, 질서정연한 만민들의 사회의 구성원들인, 질서정연한 사회의 이상적 경우를 가정한다. 첫 번째 사례는 동일한 수준의 부를 갖고 시작하는 두 사회를 다룬다. 그 중 한 사회는 저축을 하여 그 자원을 산업화에 투자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부유하게 된다. 다른 나라는, 수수한 소득만을 가진(modest means) “더 목가적이고 여가가 많은 사회”로 남아 있기를 선호한다. 롤즈는 말한다. “더 부유한 사회의 더 커진 부에 과세를 하여 이를 가난한 사회에 재분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두 번째 사례도 첫번째 사례와 다른 점은 동일하나 다만, 다소 높은 인구증가율을 가정한다. 한 사회는 인구 증가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여 높은 증가율을 억제하여 제로 성장을 달성하는 반면에, 다른 사회는 “그 여성들에 의하여 자유롭게 견지되는”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이유로 인해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여기서 롤즈의 사례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요건으로서, “여성에 대한 평등한 정의의 요소”를 전제하고 있다.[LP, 18n])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구통제를 실시한 사회의 일인당 소득이 더 높게 된다. 다시금, 부유한 나라의 부에 과세하여 그것을 종교적인 이유로 인구를 더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를 자유롭게 선택한 더 가난한 나라에 재분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다” (LP, 117-8)


롤즈는 애초에 차등의 원칙과 같은 분배 정의를 빈곤이나 불행(misfortune)을 완화하는 역할의 측면에서(in terms of)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렇기 보다는 그는, 부의 고정된 양의 할당이라는 좁은 문제를 더 넓은 범위의 일련의 쟁점을 다루기 위해 변형합니다. 분배 정의는,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하며 각각이 사회생산에서 그 또는 그녀의 공정한 몫을 하는 사회적으로 협동적인 시민들 사이에 경제적 관계 및 재산관계를 어떻게 공정하게 구조화할 것인가라는 넓은 질문의 일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롤즈는 분배 정의의 질문을 민주주의 사회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그들의 독립, 자존감, 자유, 그리고 평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관계와 부의 분배를 어떻게 구조화해야 하는가라는 더 넓은 질문에 결합시킵니다.



5. 결론

롤즈의 <정의론>에 전제된 가정들의 정합성을 면밀하게 탐구하고 <만민법>을 읽으면, <만민법>에 나타난 롤즈의 원칙이 더 타당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는 그렇게 읽지 못하기 때문에 프리먼 선생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독이 필요한 글입니다!


<끝>


p.s. burdened peoples는 한국의 <만민법> 번역본에는 ‘고통을 겪는 사회’라고 되어 있으나 저는 ‘곤경에 처한 사회’라고 일단 번역하였습니다. 고통은 어떤 사회라고 겪고 있을 수 있지만, 원조의 의무가 적용되는 사회는 정치적 자율성을 행사하여 자립적인 경제를 이룩할 정치, 문화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강하므로, 그러한 곤경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고, burdened라는 사전적 의미에도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