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Robert F. Nagel, “Liberals and Balancing”, U. Colo. L. Rev. 63, 1992
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요약 내용을 먼저 적고 간략하게 비판하도록 하겠다.
319
법원이 형량 심사(balancing test)를 하는 것은 범주 심사(categorical test)를 할 때와 다른 결과들을 가져온다.
i) 판사 판결 자체가 달라진다.
ii) 소송당사자들이 개진하는 변론이 달라진다. 그들의 주장을 개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들 각각의 승소확률이 달라진다.
iii) 대중이 법원 판결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iv) 사법부의 재량이 어느 정도이며 하급심이 어느 정도의 재량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하는지 등에 영향을 미쳐 복합적 제도로서의 사법부에 차이를 가져온다.
형량 접근을 택한 Burger Court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죄수 수감 조건이 위헌으로 변경되었고, 공공 부조, 남녀차별, 학교인종분리와 버스통학, 표현의 자유 확대 등 심대한 영향을 가져왔고, (320) 형량은 개인의 권리를 확대하고 사법부 권력을 확대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alckmun 대법관은 Roe v. Wade 판결에서 드러나듯이 임기응변적 형량, 사안별로 조금씩 발전하는 보통법식 형량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이익을 살펴보기는 하였지만 이 모든 정보는 궁극에는 실제로는 형량되지 않았다. 즉, Roe 판결에서 결과로 나온 것은 오코너 대법관이 현재 실실행하고 설리반 교수가 권고하는 식의 임기응변적 형량이 아니었다. 로 판결의 결과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낙태에 관한 쟁점을 해결하는 보편적 공식이었다.
321 그런데 보수 법원이 범주 접근이 아니라 형량 접근을 택한다고 개인의 권리 확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형량이란 모든 고려사항들을 고려하는 것이므로 권리 주장자 측의 고려사항 뿐만 아니라 권리반대자 측의 고려사항도 고려하게 될 것이므로 형량 심사를 한다고 해서 일정 방향의 결론 (자유주의적) 결론을 낳지는 않는다.
322 개인의 권리 쪽에 유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소송을 걸 기회가 많아진다.
2) 소송은 정부 행위에 대한 이의를 접수하고 다루는 장이다.
3) 가장 열악한 케이스를 채택해서 결론을 얻어내면 그 원리를 확립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4) 사안을 하나씩만 다루므로 전체 제도 망 속의 한 제도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될 수 있다.
5) 개인의 권리를 확정하는 데 반대하는 이유들은 추상적인 이유들이다. 권력분립, 연방주의, 민주적 책임성 등. 이런 이유는 분산되고 체계적인 장기적인 결과로서만 구현된다. (323) 반면에 개인의 이익은 구체적, 직접적 이익으로 보이고 위험에 즉각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개인의 이익에 비해 공익을 소홀히 하기 쉽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강한 철학적 정향이 요구된다.
<요약끝>
요약번역자의 비판
위 내용은 몇 가지 중대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1) 형량 심사와 범주적 심사는 배타적으로 상이한 심사라 할 수 없다. 형량 심사는 고려해야 할 이익들을 고려하여 그 비중을 따져 이익들의 조화로운 균형이나 그 사안에서의 우선성 규칙을 도출하는 심사다. 범주적 심사는 기본권 조항들의 의미를 확정하는 범주의 원칙을 정하고 그렇게 정해진 원칙상의 범주에 사안이 속하는지를 명확한 요건 충족 여부를 따져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호되는 표현에 '싸움을 거는 말'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범주 원칙을 정하면, 싸움을 거는 말인지 아닌지를 범주 심사를 통해서 알아보고, 표현의 자유를 적용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범주적 심사로서만 모든 사안을 해결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첫째로 범주에 관한 원칙은 형량을 통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독일 학설에서 넓은 구성요건 이론과 좁은 구성요건 이론의 대립과 마찬가지의 문제이지, 형량과 그 외의 이론과의 대립이 아니다. 헌법의 추상적인 규범 개념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은 규범적 정당성을 지닌 해석이어야 하며, 규범적 정당성은 법규범 원리들에 대한 세심한 형량을 요한다. 표현의 자유에서 '음란' 표현을 제외할 때에는 모종의 형량이 뒤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추론 없이 그냥 그래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임의의 순간에 생성된 결단에 기본권을 내맡기는 것이다. 보호되는 영역과 보호되지 않는 영역을 가를 때 뿐만 아니라, 보호되는 영역이라 할지라도 제시된 공익 때문에 그와 같이 제한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또다른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범주 원칙들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 원칙들은 결국 형량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범주 심사라고 하는 것은, 유사한 사안에 대하여 법원이 이미 형량한 결과로 내놓은 구체적인 우선성 규칙의 적용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형량이 심리적인 가늠하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테이블 위에 여러 법익들을 올려 놓고 결론을 냅다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해당 개념 범주가 어떤 원리를 구현하려고 하고 이 원리는 전체적으로 어떤 정합성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를 따져야 하며, 논증대화에서 논증되어야 할 바는 무엇이고 어떤 것이 결여되면 성공적으로 논증되지 못하였는지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본권 제한의 비례성 심사는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즉 헌법에 합치하는 심사이다.
balancing에 관한 미국 헌법학계의 수많은 논문들의 훑어본 결과, 현재 미국 헌법학계는 잘못된 실무가 던진 오도하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즉, 형량 심사와 범주적 심사라는 무언가 배타적인 접근 방식이 실제로 존재하며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잘못된 문제 설정말이다. 이 문제 설정은 과거 Burger Court의 대법관들 뿐만 아니라 현재 Rehnquist Court의 대법관들 역시 반복해서 설정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립 설정을 하기 때문에, 애초에 헌법에서 비례성 원칙을 명하고 있는 한국 헌법의 해석론에서 미국 이론을 내실있게 감안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2) 형량을 하게 되면 개인의 권리 확장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변적인 추론일 뿐이다. 저자가 제시한 것은 아무런 엄밀한 경험적 증거도 없고, 단지 두 세대의 법원의 판결 경향을 비교하여 보고 이야기한 것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의미가 없는데, 그것은 애초에 던진 질문인 형량이냐 범주적 접근이냐의 구분이 사실은 지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에서 헌법재판에서 법익 형량의 결과를 보고 있으면 전혀 반대의 결과를 읽을 수 있다.
1) 개인이 소송을 걸 기회가 많아지지만 이것은 거의 다 각하되거나 기각되는 것이 일상이므로 실제로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권리주장도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즉, 또 하나의 사람이 이익 주장을 하는구나 정도로 취급된다.
2) 소송은 정부 행위에 대한 이의를 접수하지만 정부 측의 항변도 접수하고 다루는 장이기도 하다. 만일 이런 식의 성격 규정이 맞다면, 소송이 원고의 청구의 당부를 다루는 장이기 때문에 애초에 편향적으로 원고에게 유리하다는 사변이 가능하다. 이런 사변은 엉터리다.
3) 가장 열악한 케이스를 채택해서 결론을 얻어내면 그 원리를 확립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국가가 강제하는 기본권 규범은 모든 당사자 특히 가장 최저의 위치에 있는 당사자에게도 헌법적으로 감수할 만한 결과를 초래해야 한다는 원칙의 당연한 수반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재판에서 확립한 헌법 법규범이 일관되게 적용되기 위한 토대이기도 하다. 간통을 범한 사람이 보기에 불쌍한 미모의 여인이건, 추잡하게 생긴 아저씨이건 그런 사정을 고려함이 없이 원리는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에 내재한 속성이지, 개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확장시키는 속성이 아니다.
4) 사안을 하나씩만 다루므로 전체 제도 망 속의 한 제도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될 수 있다는 사변은, 형량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형량에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 한편으로 다른 한편에는 제도가 형량되는 것이 아니다. 형량에서는 항상 제도들이 문제된다. 즉, 개인에게 맡겨져 있는 관할권과 국가가 조율하고 간섭할 수 있는 관할권의 경계를 긋는 것이다. 그래서 형량에서는 양 측 법익 모두 제도화된 망 속에서 그 비중이 고려된다.
5) 개인의 권리를 확정하는 데 반대하는 이유들은 추상적인 것이고, 개인의 권리를 찬성하는 이유들은 구체적이라는 것 역시 엉터리 형량을 전제로 한다. 형량이 제대로 되려면 추상성과 주관성은 같은 평면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 이익과 정책으로 추구되는 공익 모두, 모든 기본권 주체를 포괄할 수 있는 원리를 구현하는 이익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되었을 경우에 두 이익은 모두 추상적인 이익이자 주관적인 이익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형량 자체에는 어떠한 편향도 없다.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많이 생기는 편향은, 공익은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놓아두고 기본권의 이익은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내버려두어, 전자가 후자를 쉽게 압도하는 편향이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형량 접근과 범주적 접근을 나누는 이분법으로 인해 미국 헌법학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2) 기본권의 추상적이고 개방적인 개념의 의미를 좁게 확정하는 범주 심사를 하게 만드는 원칙은, 형량의 결과로 나온 우선성 규칙이다. 따라서 그 범주 심사에 쓰이는 원칙의 타당성은, 그 원칙을 도출케 한 형량의 타당성에 달려 있다.
(3) 형량에는 어떠한 편햔성도 그 자체로 내재하고 있지 않으며, 편향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형량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왜냐하면 형량은 구체적이고 확정적인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과,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공익의 비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 오히려 형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해당 정부 정책으로 제한되는 이익과, 추구되는 이익 모두, 기본권의 범주 수준(모든 기본권 주체를 포괄할 수 있는 수준)에서 추상성을 고정하고, 또 그 이익을 보는 관점은 주관적 관점으로 고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추상수준과 관점을 고정할 때야, 비로소 논증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형량의 기초 입장이 마련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