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두 가지 논지를 갖고 있습니다.
논지 (1): 퀑의 청구권에 관한 증거 관련적 이론은 틀렸다. 증거 관련적 이론이란, 행위자에게 활용가능한 증거를 감안할 때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합당하게 기대할 수 없을 경우에는 피작용자는 애초에 청구권을 갖지 않으므로 청구권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논지 (2): 덜한 악 정당화에 의해 청구권 침해가 허용된다면, 그것은 또한 명령된다.
이에 대한 결론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나는 장래의 의무 보유자가 활용가능한 증거가 행위자의 청구권 보유를 결정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퀑이 틀렸다고 논하였다. 퀑이 말한 결론과는 달리, 증거 기반 견해는 속은 군인 사안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청구권이 없다고 하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증거 기반 견해는 덜한 악 정당화가 있는 경우에 행위자에게 청구권을 인정하면서도 하루의 끝 사안과 같은 사안에서는 청구권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없으며 그럼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트롤리 사안과 같은 덜한 악 사안에서 의무와 청구권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는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트롤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명해지는 것이기도 하며, A는 트롤리의 방향이 돌려지는 것에 대항하여 방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논하였다. 그러나 B가 하루의 끝 사안과 같이 B가 객관적 정당화 사유 없이 행위하는 경우에는 A는 해악을 입는 것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위해도 된다."
저는 저자의 논지(1)은 타당하지만 논지(2)는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논지 (1)은 프라우가 지적하고 있듯이 청구권의 보유 자체와 청구권의 위법한 침해를 퀑이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권리의 존부 자체를, 행위자의 우연한 증거 여건에 대하여 의존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권리는 객관적으로 보유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지, 그 권리 보유자에게 작용하는 행위를 하게 된 행위자가 우연히 제한된 증거만을 갖고 있어서 그 행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달리 행위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에 의해 갑자기 보유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렇게 보면 제한된 청구권에 대하여 보상하여야 하는 의무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긴급피난으로 타인의 재물을 손괴한 사람은 청구권을 위법하게 침해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청구권을 제한한 것이며 자신이 손괴한 재물의 가치를 보상해야 하는데, 애초에 청구권이 없었다면 보상의무도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증거 관련적 해명의 어떤 수정된 판본은 청구권의 제한(침범)이 아니라 청구권의 위법한 침해와 관련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퀑의 판본을 수정해야 합니다. 즉 인식적 과정이 부당하게 왜곡되어 있는 여건의 행위자에게 합당하게 기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청구권의 침해의 위법성을 좌우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행위자의 달리 행위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면책 사유이지 위법성 조각 사유는 아닙니다. 이는 퀑이 드는 예인 속은 군인의 사례와 같이, 독재정권에 의해 극히 제한된 거짓 정보만을 세뇌하듯이 주입받은 사람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착각하고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였을 때, 여전히 위법한 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법성은 규범 체계 전체의 망에서 바로 그런 여건에서 그런 행위를 일반적으로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이지, 바로 그 구체적인 사람에게 달리 행위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한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문제는 책임 조각의 문제가 제한적으로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논지(2)에 대한 저자의 논지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는, 저자가 트롤리 문제를 단지 이중 효과 원칙에 의해서만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트롤리 문제는 이중 효과 원칙의 문제라기보다는 하기와 내버려두기 구분 원칙의 문제이며, (어떤 가정들이 성립한 상황에서의) 트롤리 방향 돌리기는 하기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내버려두기에 포섭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저자가 대단히 느슨한 문턱 의무론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10명 정도를 살리기 위해 1명을 죽이는 것은 정당화된다고 보는데, 이것은 통상의 문턱 의무론자들보다 훨씬 완화된 조건입니다. 즉 1명의 무고한 사람을 유죄로 만들어서 10명의 중범죄자를 억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인데 이 정도로 완화된 조건을 지지하는 문턱 의무론자는 제가 읽은 바로는 헬렌 프라우가 처음입니다. 엄격한 문턱 의무론자는 인구의 3분의 1의 상실이라는 재앙적 조건을, 그보다 좀 느슨해도 소도시의 궤멸과 같은 상황을 문턱으로 봅니다. 그런데 피작용자 자신에게 어차피 같은 운명이 닥칠 상황이라거나 피작용자가 이미 그 위험 분배의 공정한 원칙에 동의한 범위에 포괄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지점을 문턱으로 설정하건, 문턱 의무론은 의무론이 아니라 일종의 혼합 목적론으로, 정합적으로 지탱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논지에 대한 외적 비판입니다.
저자의 논지에 대한 내적 비판은, 저자가 트롤리의 방향 돌리기가 허용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명령된다는 결론에 대한 반론을 처리하는 방식이 대단히 작위적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트롤리 전환기 곁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다리를 잃으면서 다른 1명을 동시에 트롤리에 치여 죽게 만드는 경우에는 트롤리 돌리기가 허용되더라도 명령되지는 않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유로 사람은 자신에게 미치는 해악을 '할인'(discount)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할인'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붙인 것으로 도저히 제대로 된 설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행위자 관련적 규범을 행위자 중심적 규범과 혼동하여, 의무론적 규범을 단지 행위자가 자신에게 미치는 해악은 마음대로 할인하거나 늘려서 비중을 크게 보거나 하는 '할인'을 매개로 하여 그 내용이 결정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맥머헌과 같이 트롤리의 방향 돌리기는 허용되나 명령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 옳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더라도, 그대로 있으면 트롤리에 치여 죽게 될 B가 트롤리 전환기를 돌린 A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으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데, A는 내버려두기에 속하는 행위를 한 사람으로서 특별히 위법한 해악의 원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A가 트롤리를 부주의로 잘못 작동하거나 원래 5명을 죽일 의도로 과속으로 작동시킨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말입니다. 물론 A가 정말로 하기가 아니라 내버려두기를 한 것이 되려면 결국 주선에 있는 5명과 지선에 있는 1명이 특정한 종류의 관계에 있어야만 합니다. 즉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트롤리 사안은 사실은 많은 가정들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곧바로 답을 할 수는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논문의 저자가 결정적 논거로 내세운 것이 틀린 것이기는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권리의 정당한(합법적) 제한/부당한(위법한) 침해와 행위자의 증거가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관한 논의는 헌법학에서는 기본권 제한의 합헌성 심사 강도와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일반적으로 기본권 제한의 엄격한 심사는 내용 통제, 느슨한 심사는 명백성 통제이고, 그 중간의 심사는 납득가능성 통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납득가능성 통제는 입법 당시의 입법자에게 활용가능한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입법자가 그 증거를 잘 고려해서 납득가능하게 행위하였는가를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납득가능성 통제가 내용통제보다 느슨한 부분에 관해서 두 가지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점 한정의 문제입니다. 입법자가 t1 시점에 활용가능하였던 증거로 기본권을 제한했는데, 헌법재판이 이루어지는 t2 시점에 활용가능한 증거로는 입법자의 행위가 근거가 없는 부당한 추론에 기초한 것임이 드러난 경우에, 과거의 어리석은 결정의 좁은 시야를 기준으로 권리의 위법한 침해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법자의 입법은 사인의 단 한 번의 행위와는 달리 계속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이후에도 계속 집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전등 스위치 올리기와 같은 일회적 사건으로 볼 수 없습니다. 즉, 이것은 전등 스위치 올리기가 언제나 이웃 중 누군가를 화상입힐 것이 판명되고 나서도 계속 그렇게 전등 스위치를 올릴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납득가능성 통제라는 심사 강도에 따른 심사 방법으로서, 해당 입법 시점의 증거를 기초로 한다는 해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입법자의 증거 조사 활동 자체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 논문에 나오는 속은 군인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왜곡된 인식적 과정에 이미 처한 관점에서 그럼직해보이는 증거는 청구권의 위법한 침해 여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입법자가 어떤 증거 수집과 평가를 거쳤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증거 수집이 인식적으로 왜곡된 과정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 평가는 인식적으로 왜곡되거나 협소한 평가 방법인지 아닌지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백성 통제와 내용 통제는 전혀 별개의 방법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합당한 증거 수집과 평가의 요구가 양적으로 더욱 엄격해지거나 느슨해지는 문제로 봐야 할 것입니다.